

지난 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17년 범금융 신년인사회’에서 만난 금융권 수장들은 올해 금융 상황을 묻는 질문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답답하다’, ‘돌파구 찾기가 쉬지 않다’, ‘생존 게임을 벌인 것 같다’, ‘초(超)불확실성의 시대’, ‘크레바스(남극 비하지대에서 감자기 나타나는 깊고 좁은 틈) 등의 표현을 쓸 만큼 위기감을 토로했었다.
그래서 인지 올해 신년사에서 금융권 CEO들이 채택한 사자성어에는 어느 해보다도 강한 비장함이 느껴졌다. '승풍파랑(乘風破浪), 마부작침(磨斧作針), 상유십이(尙有十二), 침과대적(枕戈待敵), 행불무득(行不無得)…'.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더한 경제위기라는 인식에 '위기돌파'의 결기를 다지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실 돌이켜보면 위기가 아닌 해가 없었고 이를 극복하려는 혁신을 주문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하지만 새해 벽두 들려오는 금융권 CEO들이 제시한 사자성어(四字成語)와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의미해보면 ‘올해가 정말 위기는 위기인가 보다’라는 공포감마저 묻어난다. 동시에 이를 돌파하기 위한 자세를 절실하게 주문한다.
먼저 은행권 CEO 신년사에서는 ‘승풍파랑(乘風破浪)’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이동걸닫기



그런가 하면 지난해 조선업 구조조정 부실로 대규모 손실을 경험한 김용환닫기


이 같은 ‘비장 모드’는 경제부처 수장들의 신년사에서 절정을 달했다. 우리 경제 컨트롤타워인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국민 신년사에서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사자성어를 꺼내 들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의 마부작침은 어려운 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정부와 기업, 근로자 등 경제주체들이 하나로 뭉쳐 위기를 극복한 과거 전통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보자고 강조한 말이다. 올해가 정유재란이 발발한 지 7갑(甲, 420년)이 되는 정유년이라는 점에서 이순신 장군의 의지를 빗댄 표현도 신년사에서 여러 번 등장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대승에 앞서 선조에게 올린 교지에 들어있는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는 뜻의 상유십이(尙有十二)를 신년사에서 언급했다. 진웅섭 금융감독원장 또한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기다린다'는 침과대적(枕戈待敵)의 자세를 주문하기도 했다. 올 한해가 어느 때보다 책임이 막중한 한 해가 될 것인 만큼 매사에 높은 수준의 경각심을 갖고 업무에 임해달라는 메시지다.
이쯤 되면 신년사에서 풍기는 비장함에 차라리 출사표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물론 신년사에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건네는 따뜻한 덕담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쟁은 이미 전쟁을 방불케 하고, ‘대출’이니 ‘환율’이니 하는 경제용어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붙은 지도 오래다.올해 신년사들이 어려운 현실보다는 이를 극복하려는 자세와 마음가짐에 방점을 찍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해마다 반복해 강조하는 ‘위기’와 ‘혁신’에 위기는 일상화됐고, 혁신은 평범해졌다. ‘이번에는 진짜 위기’라고 강조하고자 표현은 더욱 비장해진다.
위기의 극복에는 비장함보다 해결책을 마련할 지혜가 필요하다. 매해 강조하지만, 항상 위기가 반복되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위기를 극복할 해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흔히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지 않나. 올해는 여느 해보다 변화무쌍하고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란 점에서 이를 적극 대응하고, 잘 극복한다면 더 많은 발전을 이룰 것이란 점도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해법을 찾기 바란다.
김의석 기자 eskim@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