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 관계자는 “국내 대표 기업 삼성전자가 비로소 ‘삼성다움’을 회복하는 거 같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14일 영국계 사모펀드 트라이튼으로부터 유럽 최대 공조기기 업체 플랙트그룹 지분 100%를 15억 유로(약 2조400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플랙트는 1918년 설립된 독일 공조 기업이다. AI(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은 대형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냉각액을 순환시켜 서버를 냉각하는 액체냉각 방식인 CDU(Coolant Distribution Unit)에서 글로벌 최고 수준 기술을 가진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태문닫기

앞서 삼성전자는 같은 달 6일 자회사 하만 인터내셔널을 통해 미국 마시모 오디오 사업부를 3억5000달러(약 5000억원)에 인수하며 전자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마시모 오디오 사업부 인수는 삼성전자가 지난 2017년 80억 달러(당시 9조4000억원 규모)를 들여 하만을 인수한 이후 8년 만에 재개한 조단위 대형 M&A(인수·합병)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간 삼성전자는 혁신 기술이나 유망 스타트업 등에 대한 M&A에 다소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대형 M&A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이런 평가는 애플, 구글, 메타 등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에 사활을 거는 글로벌 빅테크와 비교해 삼성의 고질적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삼성전자 M&A 시계가 멈춘 사이 회사 곳간에는 현금이 쌓여갔다. 삼성전자 미처리 이익잉여금(순이익 가운데 배당·시설투자 등을 제외한 자금, 유보금)은 2020년 96조원에서 2021년 112조원으로 100조원을 처음 돌파하더니, 2024년에는 146조원을 넘겼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은 투자로 가치를 창출하고 다시 이를 재투자하는 선순환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며 “그런데 제조기업이 현금을 쌓아두는 것은 자본의 비효율적 운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업계 지적을 의식한 듯, 수년 전부터 ‘대형 M&A’를 공언해 왔다. 2021년 정현호 부회장이 “3년내 의미 있는 M&A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시작이다. 지난해 고 한종희닫기

그러다 하만 인수를 주도했던 안중현 사장이 지난해 삼성글로벌리서치에서 삼성전자 경영지원실로 전격 복귀하면서 ‘빅딜’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 ARM, 차량용 반도체 관련 기업 네덜란드 NXP, 독일 메모리 업체 인피니온 등이 주요 대상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M&A가 지연되고 본업인 메모리 반도체마저 경쟁력 저하가 발생하며 삼성전자는 부진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2020년대 들어 AI 반도체 수요 급증으로 고대역폭 메모리(HBM) 기술 개발이 시급했지만 안일하게 대응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전 세계 D램 점유율(매출 기준)에서 SK하이닉스는 36%로, 34%를 기록한 삼성전자를 제치고 글로벌 1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에 추월당한 것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회사를 둘러싼 위기를 부각하는 강도 높은 메시지를 내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며 “1999년 다우지수를 구성했던 30개 기업 중 24곳이 이미 사라졌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삼성 계열사 임원 2000명을 향한 영상 메시지에서 이 회장은 “경영진부터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최근 삼성전자가 발표한 M&A는 본업과 시너지가 약한 수익성 사업이라는 일부 지적도 있다. 가장 화두가 되는 AI, 반도체 분야가 동떨어졌다는 평가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 내재화와 업황 반등에 대비한 투자가 확실히 확대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삼성전자 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회사는 올 1분기 연구개발(R&D)에 9조348억원을 투자했다. 작년 1분기 7조8201억원보다 15.5% 증가한 1분기 역대 최대 수준이다.
시설투자(CAPEX)도 늘었다. 올 1분기 시설투자액은 11조998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1% 증가했다. 특히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DS부문에서는 13.3% 증가한 10조9480억원을 투입했다.
올해 이 회장은 오너 경영자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삼성은 소극적 투자 기조 배경으로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해왔다”며 “이제는 그런 핑계가 사라졌다. 앞으로 이 회장이 본인의 경영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곽호룡 한국금융신문 기자 horr@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