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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칼럼) 낙하산, 혹은 양상군자

장태민

기사입력 : 2020-02-0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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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전 총리는 2012년 토론토 블루제이스 홈구장 로저스센터의 시구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출처: 캐나다 한국일보

정운찬 전 총리는 2012년 토론토 블루제이스 홈구장 로저스센터의 시구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출처: 캐나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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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융신문 장태민 기자] 2017년 말의 어느 날.

주말에 동네 주민 한 사람과 맥주를 마실 때 정운찬 전 국무총리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이 주민이 대뜸 정운찬씨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가 된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야구계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다면서 정씨를 '낙하산'이라고 규정했다.

정권이 바뀐 뒤 야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야구계의 수장으로 온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정운찬씨는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입니다. 힘과 인맥이야 있겠죠. 그런데 그의 이런 이력이 야구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가 정운찬 전 총리의 야구 사랑, 혹은 야구광으로서의 면모를 모를 리 없었다. 정 전 총리는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시구를 할 만큼' 야구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동네 주민이 볼 때 정 총리는 야구와 관련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동네 주민의 야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야구선수로 키우는 과정에서 야구업계의 인물들을 오랜 기간 접촉해왔다.

그의 얘기를 듣다보면, 그가 한국 야구산업의 흐름과 잘못된 관행 등에 대해서도 누구 못지 않게 정통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특정 프로야구팀의 골수팬이기도 했고 10년이 넘는 기간 아들을 야구선수로 키우기 위해 분투한 '열혈' 학부형이었다.

나는 정운찬씨의 이력이 한국야구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그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는 대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정 총리가 취미로 야구를 좋아한다는 이유가 KBO 수장으로 적합하다고 보시나요? 한 마디로 웃기는 소리지요. 야구인이나 스포츠 행정가, 야구 인프라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기업인 중 그가 어떤 카테고리에 해당하나요? 당신도 속으로는 그냥 야구계를 무시하는 낙하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시 언론 기사들 중엔 "야구를 잘 아는 경제학자 출신의 '야구인'이 KBO 수장이 된다"는 식의 환호작약하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동네 주민의 말마따나 그런 보도는 사실 쳐다 보기도 민망했다.

■ 정권 패밀리의 '공기업 사장' 나눠먹기 관행은 여전

동네 주민은 더 나아가 정운찬 전 총리의 KBO 총재 기용을 통해 문재인 정권에서도 공기업이나 각종 '애매한' 자리를 사이좋게 나눠 먹을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번 일은 적폐청산을 화두로 제시한 문재인 정권의 인사가 이전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의 낙하산 인사와 진배없을 것임 알려주는 확실한 시그널입니다. 이미 그런 작업들이 시작됐고요."

그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적폐 청산'에 내심 기대를 거는 듯 했으나 공기업 인사를 보면서 기대를 접었다고 했다.

정 전 총리가 KBO 수장이 되기 전 많은 정치인들이 각종 '장' 자리를 꿰찰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정 전 총리가 2018년부터 KBO 총장으로 업무를 시작하기 전인 2017년 11월 이강래 전 국회의원이 한국도로공사 사장 자리를 차지했다.

굳이 다른 사람도 많은데 이강래라는 인물을 끄집어 내는 게 마음이 편치 않다. 그의 이름을 거론한 이유는 그와 그가 몸 담은 곳의 '명성' 때문이다.

워낙 유명한 정치인인 데다 한국도로공사라는 공기업 또한 모두가 다 알기 때문에 이강래씨 사례를 거론하는 것일 뿐이다.

세간에선 이강래씨가 도로공사의 수장으로 간다는 소문이 '문재인 정권의 본격적인 낙하산 인사'를 알린 시그널로 평가 받기도 했었다.

■ 달라진 게 없는 낙하산 관행..공기업 사장 한 뒤 다시 국회로 복귀하려는 이강래

물론 한국의 인사가 아주 허술하지는 않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는 공기업 CEO 임명과 관련해 임원추천위원회의 복수 인사 추천이 필요한 것으로 나와있다.

기획재정부 운영위원회의 심의ㆍ의결 과정도 필요한 데다 주무장관의 제청과 대통령의 임명까지 필요하다. 절차가 상당히 복잡해 '낙하산'이 쉽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면도 있다.

하지만 정권의 실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복잡한 관문'은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이강래씨의 도로공사 사장 낙점 소문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7년 여름부터 이미 시중에 나돌았을 정도였다.

'친박' 정치인으로 통했던 김학송 사장이 임기를 6개월여 남겨놓은 7월 7일 '도로의 날'에 사의를 밝히면서 '새로 들어선 정부와 친한' 정치인이 사장으로 온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이강래 사장은 재임 기간 회사와 가족의 커넥션 의혹을 받아 구설수에 올랐던 전력도 있다.

희한하게도 자유한국당과 민주노총이 동시에 이강래 사장의 가족회사가 도로공사에 LED 가로등 부품 납품을 하고 있다면서 의혹을 제기했다. 스마트 LED 가로등 교체사업에서 이 사장 동생회사인 인스코비가 핵심부품을 납품하고 있었는데, 이 사장이 2017년 11월 취임한 뒤 인스코비 실적이 급증해 의혹이 불거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강래 사장은 2020년 4월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이 좋은 자리를 내던졌다. 또 도로공사 가로등 사업 관련 가족 특혜 의혹도 '혐의 없음'으로 잘 마무리 됐다.

유명 정치인에서 유명 공기업 사장으로 변신했던 이강래 '후보'는 이제 다시 '선량'이 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바지 할 태세를 갖췄다. 한국인에겐 정권과 친하기면 하면 없던 능력도 생기는 특별한 유전자라도 있는 것일까?

■ 최장기간 출근 저지 기록 세운 윤종원닫기윤종원기사 모아보기

2020년 들어 '낙하산 논란'이 가장 뜨거웠던 인물은 청와대 경제수석 출신의 윤종원씨였다. 올해 1월 2일 기업은행장으로 선임된 윤씨는 1월 내내 본점으로 출근하지 못했다.

노조가 '낙하산 반대'를 내세워 출근을 저지하면서 윤 행장은 최장기간 출근을 정지당한 은행장으로 기록됐다. 26일 간의 출근 저지는 2013년 이건호 KB국민은행장 당시 13일의 기록을 훌쩍 넘어선 금융권 최장기록이라고 한다.

특히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1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리를 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윤종원 행장이 낙하산 아니냐는 질문에 "기업은행은 국책은행이자 정책금융기관"이라며 "인사권은 정부에 있다"고 단언했다.

대통령은 "윤종원 행장은 줄곧 경제금융 영역에 종사한 만큼 경력 면에서 자격 미달이 아니다"라면서 "내부출신 인사가 아니라고 비토하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윤 행장이 자격 미달 인사도 아니고 청와대에서 경제수석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이 같은 답에 많은 사람들은 기존의 '낙하산'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거나 대통령의 '낙하산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하는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부패한 공기업엔 외부의 능력있는 인사가 오는 것도 바람직하다. 통상적인 경우라면 능력있는 내부인이 사장이나 CEO를 할 수 있게 해야 하지만, 외부에 '좋은' 인재가 있다면 인재 수혈을 통해 조직을 쇄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주변엔 '이상하게도' 대통령의 설명을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의 '낙하산'에 대한 정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업은행의 한 직원은 "대통령의 논리대로라면 모든 공기업에 정치적으로 친한 인사를 꽂아도 낙하산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대통령이 야당 시절 비판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은행의 노조도 비판했다. 결국 공기업의 장이나 노조 모두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할 뿐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 은행원은 "노조와 행장의 갈등은 (여당 원내대표) 이인영과 (금융위원장) 은성수닫기은성수기사 모아보기가 나서자 간단히 풀렸다. 노조도 챙길 것 챙기니 낙하산 행장 문제는 해결이 된 것"이라면서 씁쓸해했다.

그는 한국사회가 기본적으로 '염치'를 상실했다고 일갈했다.

■ 더불어민주당, 6년 전의 다짐은 어디로 가고...

2014년 3월 민주당의 민병두 의원이 '공공기관 낙하산 방지법'을 발의했다.

그가 발의한 내용은 공공기관 기관장과 감사, 이사로 임명되기 위해선 '5년 이상' 해당 분야 업무 경력이 있어야 한다는 등이 주요 골자를 이뤘다.

민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후보 때부터 수차례 낙하산 인사 근절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원칙 없는 부실인사를 통해 전문분야와 상관없는 곳에 낙하산이 임명되는 관행은 끊자'고 제안했다.

당시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1년 여 만에 100명이 넘는 친박 인사가 공공기관 임원으로 임명됐다고 주장했다.

사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한달 전 쯤엔 "전문분야와 상관없는 곳에 낙하산으로 임명되는 관행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공약까지 발표하면서 의지를 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자 당시 야당에서 낙하산 근절을 위한 법 개정 등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후 수년이 지나 더불어민주당이 집권당이 됐지만 낙하산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일각에선 박근혜 정권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도 내놓는다.

나는 이 글에서 정운찬·이강래·윤종원씨를 거론한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유명해서 글에 인용했을 뿐이다.

사실 이 정부에서도 이들보다 훨씬 더 낙하산에 가까운 많은 인사들이 공기업이나 공기관의 좋은 자리를 꿰찼다.

■ 염치없는 양상군자들..사연 있는 사람 말고 능력있는 인재를 공직에 앉혀야

중국 후한 시대에 하남성 태구현에 진식이란 존경 받는 현령이 있었다.

어느 해 흉년이 들었을 때 도둑이 진식의 집에 몰래 잠입한 뒤 대들보 위에 숨어서 가족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진식이 이를 모르는 척 하고선 가족들을 모아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나쁜 사람도 처음부터 나빴던 건 아니다. 착한 천성을 타고 났는데 나쁜 습관에 빠져 악의 길로 빠지는 것이다. 저기 대들보 위의 군자도 마찬가지다."

도둑은 그 얘기를 듣고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뉘우쳤다.

진식은 대들보 위에 있던 군자(梁上君子, 양상군자)에게 "그대는 악한 사람 같지 않다. 생활이 어려워 착한 심성을 잠시 잃어버렸다"면서 비단 2필을 줘 돌려보냈다.

이 얘기는 오래 전 중학교 한문 수업 시간에 들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엔 진식의 집에 숨어든 양상군자보다 질이 나쁜 도둑들이 너무 많은 것 아닌지 걱정스럽다.

국민의 세금으로 공적인 일을 할 사람은 내가 그 자리에 적합한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단순히 정권과의 친분 때문에 과분한 자리를 받은 것 아닌지 스스로에게, 주변 사람에게 되물어봐야 한다.

능력 없는 사람이 공적 기관의 수장을 꿰찰 경우 조직에 해를 주게 된다. 실질적인 '주인'인 국민마저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국민을 위하는 양 하지만, 실질은 양상군자와 다를 바 없다. 아니 뉘우치기라도 하는 양상군자보다 못한 일개 도둑이 될 위험성도 높다.

박근혜 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의 공기업 인사 역시 '업무와 관계 없는' 정권맨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비판이 많았다.

이런 가운데 4월 총선을 앞두고 각당이 '인재'를 영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절망하게 된다.

인재는 '능력이 있는 사람, 국민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각당이 뽑는 인재는 능력 보다는 '사연'이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능력보다 사연을 앞세워 인재를 구하는 인사 포퓰리즘은 국민에게 해가 된다.

또 이같은 '신개념'의 인재들 덕분에 '진짜' 인재들이 국민들을 위해 일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정권 창출에 공이 있는 개인에겐 상을 주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줘야 하지않겠는가. 이 당연한 상식이 무너진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장태민 기자 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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