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저성장 덫에 갇힌 한국
미국 월가를 비롯해 전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리먼 사태가 발생한지 올해로 10년. 그런데 최근 위기설이 다시금 흘러나오고 있다. 지난 10년간 가계부채는 1,500조원으로 급증했다.
가계부채 규모로만 보면 사상 최대 규모다. 가계부채가 한국경제의 뇌관으로 자리한 배경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부채비율이 95.6%(1분기)에 육박하고 빚 부실화가 가팔라지면서 국내 금융시장 붕괴로 이어질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저금리 여파로 유동성은 늘었지만, 부동산시장으로 쏠림 현상이 지속되면서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다. 소득 증가 속도보다 자산가격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면서 저성장에 따른 부작용이 이곳 저곳에서 나타났다.
대내적으로도 경제침체에 대한 우려는 갈수록 커진다. 무엇보다 반도체에 쏠린 취약한 수출구조와 중국의 맹추격이 주된 이유다.
관세청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난해 수출한 반도체는 997억 1,000만달러로 1,000억달러에 육박했다.
이는 전년 대비 60.2% 증가한 것으로 단일 품목이 연간 수출 900억달러를 돌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반도체 수출은 전체 수출액(5,736억 9,000만달러)의 17.4%를 차지했다. 반도체가 잘나가는 것은 좋지만 반도체에만 기대는 구조가 문제다.
양기인 신한금융투자 리서치센터장은 “한국 경제는 반도체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성장 산업이 없는 구조다. 반도체 산업이 꺾이면 한국 경제가 한 방에 흔들릴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중국의 ‘반도체 굴기’도 예사롭지 않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산업 진흥을 위한 3,000억위안 규모 펀드 조성 계획을 밝혔다.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인 중국은 현재 약 14% 정도인 반도체 자급률을 오는 2025년 7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창목 NH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은 “중진국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고부가 산업의 성장은 필수적”이라며 “중국이 반도체 산업 발전에 올인한 것은 경제 발전의 당연한 수순”이라고 짚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이 현재의 단순 조립, 생산기지 역할에서 벗어나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마저 쥐려 한다는 것. 한국경제연구원이 세계경제포럼(WEF) 창립자 클라우스 슈밥이 제시한 4차 산업혁명 12개 분야에 대해 한·미·일·중의 현재와 5년 후 수준을 전문가들에게 물어본 결과 한국은 중국에 비해 5개 분야에서 열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분야는 블록체인과 인공지능, 우주기술, 3D 프린팅, 드론 등이다.
산업은 산업대로 문제가 산적한 가운데 소득주도성장정책, 기업 지배구조 개혁 등의 정책 실패는 한국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를 한층 더 키운다. 20만~30만명대를 오르내리던 취업자 수 증가 폭이 지난 7월과 8월 각각 5,000명, 3,000명에 그치는 ‘고용쇼크’가 빚어졌다. 이미 3%에서 2.9%로 낮춘 올해 성장률 목표마저 버거운 상황이다.
오정근 건국대 교수는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국내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환차익이 줄어드는 등 국내투자에 대한 손실을 본 외국인의 자금유출이 많이 일어나며 외화유동성 문제가 커질 수 있다”면서 “앞으로 우리도 금리를 올려야 하는데 가계부실과 기업부실이 은행 부실로 전이되면서 제2의 금융위기로 촉발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끝나지 않은 미·중 무역갈등과 신흥국 위기로 촉발 가능성도
위기설의 외부 요인으로는 미·중 무역갈등과 신흥국 위기가 꼽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 500억달러(약 55조원)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미·중 무역전쟁을 촉발시켰다.
국제금융센터는 미국의 관세 부과 대상이 2,500억달러(약 275조원)로 확대될 경우 미중 경제가 둔화되고 물가 상승 압력이 강해져 세계 경제성장률은 최대 0.4%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2020년까지 세계 경제 규모가 4,800억달러(약 530조원) 감소할 것으로도 추정했다.
미·중 갈등이 심화하면 가장 피해를 볼 곳이 한국이란 얘기는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니다. 한국은 중간재를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이 완제품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경상수지 흑자 상태를 유지했다. 중국의 미국 수출이 흔들리면 한국이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2008년 금융위기 수준의 경기 침체 가능성이 우려되는 배경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최근 미·중 무역전쟁이 주춤하며 협상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지만 아직은 좀더 지켜봐야 하는 문제”라며 “만약 무역전쟁으로 중국경기가 둔화돼 우리 제품이 중국제품과의 경합에서 가격경쟁력이 밀리면 수출산업이 상당히 타격을 입을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신흥국 금융위기 우려도 한국 경제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신흥국 자금 이탈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금리인상이다. 미국이 금리인상을 단행하면서 달러화 가치가 오르는 반대 급부로 신흥국 통화는 약세로 돌아선다. 강달러 현상이 계속되면 달러화로 표시된 빚 부담이 커져 신흥국의 금융위기 가능성이 높아진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신흥국의 외화 표시 부채 규모는 2013년말 4조 9,000억달러(약 5,400조원)에서 지난 1분기 5조 5,000억달러(약 6,000조원)로 증가했다. 사상 최대 수준이다.
아르헨티나와 터키는 외환보유액 대비 외화부채가 200%를 웃돈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000억달러에 이르지만 외채가 4,400억달러, 외국인 주식 투자액이 5,200억달러 규모여서 위기가 급속히 전염될 경우 힘에 부칠 수도 있다”며 “위기 시 달러를 확보할 수 있는 통화스와프, 즉 한·일, 한·미 통화스와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중국은 부채가 최악 수준이고 미국과 무역전쟁에 ‘일대일로 정책’도 좌초될 분위기여서 리스크가 커졌다”면서 “아르헨티나, 터키, 브라질 등 신흥국도 위기가 확대될 수 있어 한국은 대외 리스크에 견딜 수 있는 체력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 본 기사는 한국금융신문에서 발행하는 '재테크 전문 매거진<웰스매니지먼트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김민정 기자 minj@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