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금융신뢰' 벼랑으로 모는 역대 최대 신용사면](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81416124600882dd55077bc212411124362.jpg&nmt=18)
기원전 2400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왕이 모든 부채를 소멸시키는 칙령을 내렸고, 고대 유대 사회는 50년마다 부채를 없애고 빚으로 인한 노예를 해방하는 ‘희년(禧年)’을 시행했다. 그리스 아테네의 개혁가 솔론은 빚 때문에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고 노예를 해방했다.
우리 역사에서도 빚 탕감은 낯설지 않다. 신라 문무왕은 가난한 백성의 빚을 없앴고, 조선시대에도 흉년이나 경사 때 백성의 부채를 덜어주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해 사익을 챙긴 탐관오리도 적지 않았다.
2025년, 이재명 정부가 역대 최대 규모의 ‘신용사면’을 내놓았다. 연말까지 일정 금액 이하 연체 채무를 전액 갚으면, 연체 이력이 완전히 삭제된다. 이미 채무를 청산한 사람은 다음 달부터, 연말까지 변제하는 경우도 절차 없이 기록이 사라진다.
금융위원회는 코로나19 장기화와 고금리 부담 속에서 서민과 소상공인의 회복을 돕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반응은 엇갈린다.
코로나와 경기침체 속에서도 꾸준히 빚을 갚아온 성실상환자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한다. 과거에는 연체를 모두 갚아도 기록이 수년간 남아 금융 거래에서 불이익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즉시 말소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차라리 연체했어야 했다”는 씁쓸한 목소리마저 나온다.
이 반발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다. 전액 상환은 당연한 의무지만, ‘전액 상환’과 ‘성실 상환’은 다르다. 생활비를 줄여 하루라도 빨리 빚을 청산하려 애쓴 사람과, 당장 생활비를 우선해 상환을 미룬 사람의 결과를 똑같이 취급하면 금융규범의 근간이 흔들린다.
‘빚을 제때 갚으면 손해’라는 인식이 퍼지면 신용 질서는 붕괴할 수 있다. 한 시중은행 여신 담당 임원은 “경기 침체 때마다 사면이 반복될 것이란 기대가 생기면 도덕적 해이가 확산된다”고 경고했다.

2025년 이재명 정부의 역대 최대 신용사면에 성실상환자들이 박탈감을 호소하며 금융 질서 흔들림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뢰 유지를 위해선 단순 기록 삭제보다 사면 이력 관리와 성실상환자 인센티브 등 정교한 대책이 필요하다.
이미지 확대보기과거 사면 때도 대상자의 신용등급이 단기간에 크게 오르고, 신용카드 발급이나 1금융권 대출이 가능해진 경우가 많았다. 개인사업자의 신용도 역시 개선됐다. 하지만 이는 상환 능력 향상이 아니라 ‘위험 판단에 필요한 기록’이 삭제된 결과다.
결국 금융회사는 금리를 높이고 대출 한도를 줄이며, 그 부담은 모든 금융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IMF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정부를 비롯해 문재인·윤석열 정부에서도 비슷한 사면이 있었지만, 반복은 “조금만 버티면 구제가 온다”는 기대를 키운다.
금융위는 “빚 탕감을 기대하며 연체 불이익을 감수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백조 원대에 이르는 세금 체납 현실은 이런 현상이 구조적 문제로 번질 가능성을 시사한다.
대규모 신용사면은 단기적으로 박수를 받을 수 있지만, 금융의 토대인 ‘신뢰’를 무너뜨리면 피해는 전 국민이 나눠 져야 한다. 지원책은 기록 삭제가 아니라 물가 안정, 경기 회복 등 근본 대책과 병행돼야 한다.
금융시장의 신뢰는 한 번 무너지면 회복이 어렵다. 성실상환자를 존중하는 사회적 신뢰, 금융규범, 신용평가의 정확성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산이다. 이를 잃으면 정치적 성과도 오래가지 못한다.
오늘의 화려한 신용사면이 내일의 부메랑이 되지 않으려면, 정부는 규모보다 정책의 질과 일관성을 중시해야 한다. 성실에 대한 보상 없이 용서만 반복한다면, 다음 위기에는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 대가는 한 세대의 금융 신뢰가 무너지는 재앙일 수 있다.
김의석 한국금융신문 기자 eskim@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