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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로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식물상자 워디안케이스 [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64]

윤형돈 네트워킹센터장

기사입력 : 2025-10-30 06:00 최종수정 : 2025-10-30 08:20

인간관계로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식물상자 워디안케이스 [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64]

워디안케이스의 탄생

1829년 영국의 외과 의사이자 아마추어 박물학자인 너새니얼 워드(Nathaniel Bagshaw Ward)는 밀폐된 유리상자에서 식물이 물없이 장기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연히 발견하고 4년간 런던의 자택에서 성공적으로 키웠다. 워드는 1833년 발명품을 시험하기 위해 식물 운반용 유리상자를 만들어 정선된 양치류, 이끼, 풀을 두 상자 가득 채운 다음 당시 가장 긴 항로인 런던에서 시드니까지 이르는 바닷길에 실어 보냈고 1833년 11월 23일 이 두상자를 책임진 배의 선장 말라드(Charles Mallard)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식물을 살아있는 상태 그대로 운반하는 실험은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다음 도전 과제는 귀환이었다. 1834년 2월, 동일한 두 상자는 호주에서 자생하는 식물로 가득 채워졌다. 워드와 종묘원 운영자로 유명한 그의 친구 로디지스는 런던에 도착한 배에 올라 영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호주 식물인 섬세한 풀고사리의 건강한 잎을 살펴보았다. 호주에서 오는 동안 흙 속에 들어있던 타닌아카시아 종자가 싹을 틔워 묘목으로 자라났다. 후에 워디안케이스로 불리게 된 식물운반용 유리상자의 첫번째 실험은 성공이었다.

그 다음은 운반하기 까다로운 173종의 식물을 담아서 이집트로 보내는 실험이었다. 2개월 후 이집트에 도착한 식물은 아주 최상의 상태로 싱싱하게 살아있었다. 워디안케이스는 그 존재가 알려지면서 전 세계 식물 이동에 대변혁을 일으켜 이후 100년간 식물을 운반하는데 수천 개가 사용되었다. 상자를 처음 사용한 곳은 상업적 종묘 회사였고, 이후 큐 왕립식물원, 런던 왕립 원예학회 등 세계 유수의 식물 관련 기관들, 탐험가, 선교사, 식물채집가, 선교사 등이 필요에 맞게 워디안케이스를 이용했으며 미국 탐사 원정대는 워디안케이스를 이용하여 4년간 식물을 채집한 다음 미국 식물원을 조성했다.

워디안케이스가 전 셰계의 식물 이동을 담당

이후 50년 동안 특정 지역에서만 자라던 바나나, 코코아, 고무, 차 등 중요 농작물을 비롯한 많은 식물이 워디언케이스로 운반되어 전 세계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국가간 대륙간 교역이 활성화되기 시작 한16세기 부터 살아있는 식물의 운반은 성공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1819년 열정적인 식물학자이자 외과의사인 존 리빙스턴 (John Livingstone)은 중국에서 런던으로 보낸 식물 1천개체 중 오직 한 개체만이 살아남는다고 추정했다. 전 세계적으로 운송이 증가하고 탐험과 무역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성공적인 식물 운반방식을 개선할 필요를 워디안케이스가 해결한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의사는 식물에 통달해야 했는데 대부분의 치료방법이 식물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육을 모두 받기전에 식물학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워드는 의학을 교육받으면서 약제사협회의 식물원인 첼시 피직 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의사가 직업이기 했지만 열정은 식물과 원예에 있었던 듯하다. 워드가 본인의 발명품에 특허를 내지 않았던 터라 워디안케이스는 다양한 디자인과 스타일로 세상에서 유통이 되었고 크게 장식용과 여행용 두가지로 분류되는데 장식용상자는 오늘날 테라리움으로 알려진 유리용기의 효시가 되었다.

워드가 전 세계적인 식물의 유통이 가능하도록 기여한 세가지 중요한 공헌을 꼽아보자면 밀폐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고안한 점, ‘호주’로 워디안케이스를 보내는 실험을 한 점, 본인의 인맥을 동원해 상자를 널리 홍보한 점이다.

워디언케이스를 세계적인 발명품으로 만든 워드의 열린 인맥관리

너새니얼 워드의 집은 항상 열려 있었다. 로버트 포춘 같은 식물채집가나 조지프 후커 같은 당대 제일가는 식물학자에게 워드의 집은 박물학자의 성역이었다. 조지프 후커는 워드의 집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를 알고 나서부터, 아니 그를 알기 오래전부터 인심 후한 워드의 집은 전 세계 박물학자들이 문턱을 닳도록 드나드는, 대도시의 리조트와도 같은 곳이다’. 워드의 식물 운반용 발명품에 대한 힌트를 얻은 것도 그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그의 인맥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워드의 정원은 야생의 숲으로 불릴 정도로 식물로 무성했고 친구들은 계속 해서 그의 집을 드나들며 워드의 환대를 즐겼다. 워드는 수십년에 걸쳐서 인맥 관리에 정성을 들였다. 국가를 떠나 30년 이상이나 서신 왕래나 교류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저명한 과학자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시간을 할애했다. 워디안케이스를 호주로 처음 운반한 찰스 말라드 선장과의 좋은 관계로 워디안케이스가 8개월간의 항해동안 어두컴컴한 뱃바닥의 지하실에서 나와 바닷물로부터 침수 영향을 받지 않고 햇볕을 잘 볼 수 있는 선미에 위치하게 된 것은 주요 성공 요소였다. 선장의 부인이 눈길을 끌 만한 호주의 식물을 골라서 워디안케이스로 다시 영국에 보냈던 것도 그러하다.
워드와 서신을 주고받은 사람을 한데 모으면 19세기 박물학 인명사전이 한권 나올 정도였는데 과학자라면 이런 인맥을 갖는 것이 특이한 일이 아니지만 직업이 의사인 아마추어 식물학자 워드는 전 세계적으로 이런 친분을 쌓았다. 이런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 덕에 본인이 발명한 워디안케이스를 다른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었다. 워드와 친분을 맺은 지인들은 그가 발명한 상자가 계속적으로 사용되도록 홍보를 이어갔고 지인들 거의 모두가 워드의 집을 방문하여 그가 발명한 상자를 눈으로 확인했다.

유리세 폐지를 이끌고 시민의 건강한 삶을 만든 워디안케이스

18세기 중반 유리는 그 중량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었다. 워드는 ‘대도시 및 인구 밀집구역에 대한 진상 조사위원회’에서 런던의 더러운 인구밀집지역인 이스트 앤드의 의료종사자로 활동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의 주거지에 빛이 더 많이 들어올 수 있다면 그들의 위생환경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리세가 폐지되어 빈부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집안에 워디안케이스를 둘 수 있다면 제일 키우기 까다로운 식물을 키울 만한 빛이 충분히 들어온다’며 유리세 폐지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를 제시했고 워드의 의견을 들은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영국정부는 유리세를 폐지했다.
유리세 폐지의 효과는 워디언케이스의 제작비용을 줄여 가정에서의 활용 및 장거리 식물 운반이 더욱 용이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1851년에 개장된 만국박람회에서 유리로 만든 수정궁건축이 가능해진 것은 유리를 상업적 규모로 저렴하게 생산하고 구입이 가능해진 결과였다. 600만명 이상이 방문한 만국 박람회에서 수정궁은 멀리 타국에서 가져온 관상식물의 전시가 가능했으며 18년 동안 물 한번 주지 않아도 식물이 잘 자라는 워드의 유리병 같은 신기한 물건도 보여줄 수 있었다. 이제 워디안케이스는 누구나 보유할 수 있는 경제적이고 대중적인 물건이 되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기자는 워디언케이스 덕분에 자연이 집으로 들어왔다는 평가의 기사를 내보내며 ‘식물 재배는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고 인생의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대단한 기쁨을 선사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워디안케이스는 만국 박람회에 전시되면서 일상 생활속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워드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워디안케이스로 명명

대부분의 발명품에는 발명가의 이름이 붙지 않는데 왜 이 상자에만 워드의 이름이 붙었을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대의를 뒷받침해줄 대형 식물원과 권력을 등에 업고 있던 시절 워드처럼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아마추어가 기억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워디안케이스는 단순히 식물을 운반하는 상자가 아니라 식물이 지역간, 국가간, 대륙간으로 이동하는 네트워크의 대명사가 되었다. 워드가 유명한 저술가도 아니고 워디안케이스로 거부가 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식물을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는 상자를 보여주고 활용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그를 애도하는 과정에서 후세에 들어 워드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상자에 밀착되었다.

워디안케이스는 워드의 사후에도 50년동안 전 세계 식물의 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식물과 흙의 이동과정에 수반되는 병충해의 검역강화와 항공기를 통한 이동시간의 단축으로 1962년에 그 수명을 다하였다. 그러나 한 세기 동안 특정 지역에만 존재하던 다양한 식물이 전 세계로 이동되면서 생산 단가도 낮추고 말라리아 등 질병 치료에도 기여하며 일반 대중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출처 및 인용: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식물상자 ( 루크키오 저)

윤형돈 칼럼니스트(운을 부르는 인맥관리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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