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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34]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의 사람들

윤형돈 FT인맥관리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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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2-0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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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34]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의 사람들
NIKE의 출발 배경은 정직이었다

필 나이트의 ‘블루리본’은 그 동안 일본의 신발회사인 ‘오니쓰카’의 미국 판매 대리점 회사였지만, 1972년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스포츠용품협회가 주관하는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자체 브랜드인 ‘나이키’의 출시를 알리게 되었다. 이번 전시회는 회사의 사활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회였다.

필 나이트는 1964년부터 지난 8년간 자동차에 육상화인 ‘타이거(현 아식스)’를 싣고 다니면서 팔기 시작해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 전역으로 판매망을 확보하고, 과거 육상선수로서의 경험을 살려 미국인의 체형에 맞는 신발을 만들 수 있는 노하우도 지원했지만, 얼마 전에 ‘오니쓰카’는 필 나이트에게 회사 지분의 51%를 넘기지 않으면 대리점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최종 통보를 해왔고 실제로 다른 대리점 발굴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고생을 거듭하며 이제 겨우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데 회사를 빼앗길 수도 있는 뒤통수를 맞게 되었다.
‘블루리본’의 초기 멤버들은 주로 육상선수 출신의 슈독(shoe dog: 신발의 제조, 판매, 구매, 디자인에 전념하는 사람으로서 한 마디로 신발에 일생을 건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이 표현을 쓴다)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오니쓰카’와의 대리점 계약조항인 ‘육상화’를 제외한 다른 신발을 개발하여 시카고 전시회에 출품하기로 전력을 다하였다. 독자 브랜드로 출발하는 신제품은 승리의 여신을 의미하는 ‘NIKE’로 정하였다.

그러나 최신 기술과 노하우를 적용하여 전시회 직전에 도착한 시제품은 결함투성이였다. 생산을 의뢰한 멕시코 공장의 기술력이 문제였다. 블루리본의 슈독들은 망연자실했다. 부스는 열었는데 이런 제품을 알릴 수는 없었다. 모두 ‘망했다’고 체념하고 있는데 전국의 영업맨들이 몰려들어서 관심을 보이고 신발이 마음에 든다고 예상을 뛰어넘는 주문을 하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검증되지 않은 제품을 팔 수는 없었다. 오랜 단골 고객에게 제품을 잘 살펴보라고 하면서 솔직히 좋은 제품이 아닌데 왜 사려고 하는지를 물었다.

그 고객은 웃으면서 답했다. ‘우리는 ‘블루리본’과 수년 동안 함께 일해왔지만 다른 곳과는 달리 항상 진실만을 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블루리본이 이 신제품, NIKE에 기대를 걸었다면 우리는 그 결정을 믿습니다.’ 필 나이트가 신발판매 대리점에서 독자 브랜드인 ‘NIKE’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배경은 정직과 신뢰였다.

8천달러가 160만달러로 돌아오다
‘블루리본’은 인생의 초기에 실패를 맛본 사람들로 시작되었다. 유망한 육상선수였지만 사고를 당해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우델’, 필 나이트와 같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육상선수였던 ‘존슨’, 한때 필 나이트의 회계법인 상사였지만 승진에 실패한 ‘헤이즈’, 변호사지만 변호사일을 싫어했던 ‘스트라세’, 필 나이트의 오레곤대학 육상부 시절 코치였던 공동창업자 ‘바우어만’ 등으로서 창업초기에는 창문이 깨어진 사무실에서 근무해야 하는 등 열악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합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위 고하, 이익여부를 가리지 않는 필 나이트의 사람에 대한 정직과 신뢰였다.

필 나이트는 60세가 넘어서야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항상 말끔한 얼굴로 은행원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자금확보를 위해 피가 마르게 동분서주하는 필 나이트를 지켜봐야 하는 부인은 회사가 망하면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가 최대 고민이었다. 심지어 ‘우델’은 봉급으로 받은 수표를 현금화하지 않고 책상 서랍에 장기간 보관하였고, 우델의 모친은 ‘우리 아들이 몸 바쳐 일하는 회사’라는 사실 하나만 믿고 한푼 두푼 모은 돈을 아무 조건 없이 자진해서 빌려주기도 했다. 그때 빌려 준 8천 달러는 훗날에 160만 달러가 되어서 돌아왔다.

NIKE의 주 생산기지는 멕시코, 일본, 아시아 등 이다. 자본금이 빈약했던 회사는 급증하는 수요에 맞추기 위해서는 날로 증가되는 수입대금을 은행의 대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대출을 받아 수입해서 판매하고 판매대금으로 대출금을 갚고 또 증가된 금액으로 수입신용장을 개설하기 위해서 은행 대출을 더 많이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반복이 되었다. 은행의 담당자도 피가 마르는 상황이어서 결국 더 이상 대출을 해줄 수 없다는 통보를 하였다. 회사에 또 위기가 닥쳤다.

그때 거래처였던 일본의 무역업체 ‘니쇼 이와이’가 백기사로 나타났다. 그 동안 ‘블루리본’이라는 회사의 경영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가 아무런 담보나 조건 없이 은행의 대출을 대신 상환해주고 현금 확보의 어려움을 일시에 해결 해주었다. ‘니쇼 이와이’의 일본인 담당자들이 국가를 뛰어넘어서 필 나이트와 ‘블루 리본’의 정직과 성실을 믿은 것이다.

1980년 12월 2일 ‘블루리본’은 ‘NIKE’로 회사의 이름을 바꾸고 뉴욕 증시의 상장에 성공하게 된다.

참고자료: 슈독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 자서전)

윤형돈 FT인맥관리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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