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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석의 단상] 시대 바뀌어도 은행은 국가경제 '최후 안전판'

김의석 기자

eskim@fntimes.com

기사입력 : 2026-05-21 05:00

'생산적 금융' 슬로건 아래 정책 도구로 전락한 은행
수익은 통제받으면서 주주 배당은 늘리라는 모순
"위기 때 실물경제 책임지는 건 은행" 잊지 말아야

[김의석의 단상] 시대 바뀌어도 은행은 국가경제 '최후 안전판'
[한국금융신문 김의석 기자] 한때 금융의 심장이었던 은행이 이제는 정책의 수족(手足)으로 전락하고 있다. '생산적 금융'의 이름 아래 역할과 책임은 끝없이 확장되지만, '준공공재'라는 프레임에 갇혀 자율성의 숨통은 조여든다. 수익은 통제되고, 의무만 늘어나는 구조다.

2025년 7월 도입된 3단계 스트레스 DSR은 은행 영업의 기반을 원천 봉쇄했고, 당국은 가계부채 억제를 명분으로 사실상 수도권 대출의 팔을 비틀고 있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민간 기업이라기보다 정부의 지시를 수행하는 '기능적 공기업'에 가까운 모습이다.

금융은 공공성을 가질 수는 있어도, 결코 공공재는 아니다. 문제는 지금 은행이 그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국은 은행에 금리 인하와 서민 지원을 강요하며 '공공재' 역할을 압박한다.

반면 시장과 주주는 정반대의 요구를 쏟아낸다. 50%를 웃도는 총주주환원율과 기업 가치를 높이라는 '밸류업' 주문이다. 벌어들일 통로는 막아두고 배당은 늘리라는 이 진퇴양난의 모순 속에서 은행의 자본 적정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글로벌 스탠다드인 바젤Ⅲ 규제를 엄격히 준수해야 하는 은행 입장에서, 이러한 비대칭적 비용 전가는 미래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독소다.

은행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홍콩 H지수 ELS 불완전판매 사태는 고객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었다. 예대마진에만 의존한 영업, 더딘 디지털 전환, 허술한 내부통제는 규제 강화의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다. 변화 대신 안정을 택했던 안일함이 더 큰 구조적 부담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잘못이 현재의 과도한 개입을 정당화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규율과 통제는 엄연히 다르다. 경쟁을 통한 규율은 시장을 건강하게 만들지만, 정치가 주도하는 통제는 시장의 자생력 자체를 거세한다.

▲은행권의 이익 중심 관행을 비판하고 공공성을 강조하는 이재명 정부 고위 라인의 주요 발언 일지.(그래픽:한국금융신문)

▲은행권의 이익 중심 관행을 비판하고 공공성을 강조하는 이재명 정부 고위 라인의 주요 발언 일지.(그래픽:한국금융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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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책 당국의 인식은 더 우려스럽다. 김용범닫기김용범기사 모아보기 정책실장은 "신용등급은 보이지 않는 계급장이 되고, 금리는 잔인한 구조가 된다"며 은행의 신용 체계를 비판했다. 대중 정치의 감성적 언어로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금융시장이 읽는 신호는 전혀 다르다. 신용은 데이터 기반의 객관적 리스크 평가이며, 금리는 위험에 매겨진 자본의 가격이다. 이 기본 원칙이 흔들리면 금융은 시장이 아니라 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 순간 자본 배분의 효율성도 함께 무너진다.

메시지의 일관성 문제도 심각하다. 과거 시스템 설계에 참여했던 정책 책임자들까지 자신들이 만든 구조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시장은 정책이 아닌 정치의 '의도'를 먼저 읽는다.

예측 가능성이 무너지면 리스크 프리미엄은 오르고, 자금조달 비용은 늘며, 투자는 위축된다. 금융 시스템의 신뢰는 일관성에서 나온다. 말이 앞서고 원칙이 뒤따르지 않을 때, 시장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과거의 실패 패턴을 기억한다.

이미 시장은 요란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5대 은행 요구불예금은 불과 한 달 새 3조원 넘게 증발했다. 퇴직연금과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대한 파격적 세제 지원, 증권사 CMA 잔액의 사상 최대치 경신은 자본의 물길이 이미 은행을 떠나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저원가성 자금이 빠져나가면 조달 비용이 오르고, 이는 결국 대출금리 인상으로 이어져 서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역설을 낳는다. 서민을 위한다는 정책적 개입이 서민의 금융비용을 끌어올리는 부메랑이 되는 격이다.

은행을 기능적 공기업처럼 다루는 접근은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실험이다.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포용금융 역시 은행의 팔을 비틀 일이 아니다. 정부 예산과 사회안전망 확충이라는 정공법으로 풀어야지 개별 금융회사에 정치적 부담을 떠넘겨선 안 된다.

금리와 배당, 경영 전략까지 정책 변수에 좌우된다면 한국 금융의 글로벌 경쟁력은 요원하다. 미국과 유럽의 정책 당국도 위기 때는 강력하게 개입하지만, 평시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경영 자율권을 반환하고 시장 원칙으로 복귀한다. 위기 대응과 상시 관치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자본시장 육성과 활황 자체는 국가 경제를 위해 반길 일이다. 그러나 자본시장은 팽창 속도가 빠른 만큼 가장 먼저 얼어붙는 변동성의 영역이다. 은행은 다르다. 위기 시 실물경제에 마지막까지 혈액을 공급하는 최후의 안전판이다.

평시라는 이유로 이 안전판의 축을 약화시키는 것은 금융 시스템 전체의 복원력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이다. 그 청구서는 언제나 국민 앞으로 날아온다.

금융은 신뢰 위에 선다. 지금 시장이 두려워하는 것은 금융의 냉정함이 아니라 정책의 무원칙이다. 운동장을 억지로 기울여 만든 균형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은행이 시장 원칙 위에서 제 역할을 다할 때, 포용도 성장도 비로소 지속 가능해진다. 시장을 대신하는 정책은 있어도, 시장을 이긴 정책은 없다.

김의석 한국금융신문 기자 eskim@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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