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을 사로잡은 총리, 여왕이 증오한 총리 [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62]](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92514483702031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1874년 보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당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가 총리가 되었다. 당시 그는 70세였고 여왕은 55세였다. 두 사람은 성격이나 태도가 매우 달랐다. 유대인 부모사이에 태어난 디즈레일리는 영국인이 보기에는 이국적인 용모였으며 화려한 옷을 입었고 댄디로 알려진 그가 지은 소설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여왕은 고집이 세고 완고했으며 태도도 딱딱하고 취미도 소박했다. 총리는 여왕을 접견할 때에는 의무적으로 왕실의 예를 갖추어야 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디즈레일리에게 여왕의 마음에 들려면 본 모습을 감추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조언을 무시한 채 씩씩하게 여왕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여왕의 한 손에 입을 맞추며 “여왕 폐하께 충성을 다합니다”라고 서약하며 총리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여왕이 무안해질 정도로 온갖 아첨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왕은 뜻밖에도 그를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웃으며 맞아주었다.
디즈레일리가 의회에서 논의된 일에 대해서 여왕에게 보내는 보고서는 역대 총리들이 제출한 것과 사뭇 달랐다. 그는 보고서에서 “천사와 같은 여왕이시여!”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영국 왕실에 적대적인 자들에 대해서는 상스러운 말로 비난했다. 새로 취임한 장관을 소개하는 보고서에는 “그는 구척장신의 거구입니다. 마치 성 베드로 성당처럼 그의 키와 몸무게를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마는 몸집이 큰 만큼 코끼리와 같은 영민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등 형식을 벗어난 불경에 가까운 형식으로 보고했지만 여왕은 그의 보고서를 탐독하며 자신도 모르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번은 여왕이 디즈레일리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디즈레일리는 답례로 아주 평범한 앵초꽃을 여왕에게 보냈다. 너무 평범하여 여왕이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는 선물이었지만 디즈레일리는 “모든 꽃 중에서 그 아름다움을 가장 오래도록 지속하는 꽃은 바로 앵초꽃입니다”라는 메지지를 곁들였다. 그 후에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앵초꽃이 되었다. 단순한 꽃조차도 여왕을 상징할 정도로 모든 명예를 여왕에게 돌렸다.
이제 여왕은 디즈레일리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찬성했다. 1870년 디즈레일리는 인도를 영연방으로 편입하면서 빅토리아 여왕을 여제로 칭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여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유대인인 디즈레일리에게 비콘스필드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평민인 디즈레일리가 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나이든 글래드스턴이 지쳐서 빨리 자리를 뜨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글래드스턴은 아주 세세한 사항까지 지나치게 열거하며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며 때로는 여왕과 말싸움까지 벌였다. 그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여왕은 자신이 멍청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여왕은 자신의 비서관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글래드스턴의 태도가 지나치게 거만할 뿐만 아니라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오.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그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는데 정말 혐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시간이 지날수록 총리에 대한 여왕의 증오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글래드스턴 같은 유형은 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관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일종의 불한당과 같아서 약한 자들을 밟고 잠시 동안 승승장구할 수 있지만 점차 사람들의 분노와 저항을 받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언뜻 보기에는 도덕적인 것 같지만 대개는 도덕을 빙자해 남을 얕보고 지배하려는 권력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도덕이란 어떤 점에서 권력의 한 형태일 수 있다
디즈레일리는 결코 직접 설득하는 방법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도덕적 순결을 늘어놓거나 다른 사람을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고 상대의 심리를 읽으며 간접적으로 접근하고 깨닫게 했다. 이처럼 디즈레일리는 언제나 상대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면서 섬세한 방법으로 상대의 경계심을 풀어 나갔다. 대부분 외모로서 그 사람을 판단하지만 디즈레일리는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빅토리아 여왕을 여자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완고하고 절제된 겉모습 이면에 여성적인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억눌린 본능을 발산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어 빅토리아 여왕이 군주로서의 재능 뿐만 아니라 여자로서 더 없이 매력적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러니 여왕이 어떻게 그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여왕은 디즈레일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디즈레일리는 여왕을 즐겁게 해 줌으로써 딱딱하고 완고한 성품을 가진 한 여자를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다.
디즈레일리는 겉으로는 상대보다 더 약해 보이지만 상대의 저항능력을 빼앗음으로써 결국에는 더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수시로 여왕의 조언을 구하고 모든 업적과 명예를 여왕에게 돌리 군주의 위신을 세워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즈레일리는 영연방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명재상으로 후세에도 인정을 받고 있다.
우리의 인격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상대가 우리를 비난하고 공격적으로 대하면 우리도 똑같이 반응하게 된다. 사람의 겉모습은 단지 그 사람이 주위로부터 그와 같은 대우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억눌리고 절제된 모습 뒤에는 억제할 수 없는 인정과 관심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평생의 정적이었던 글래드스턴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옥스포드 출신으로서 정가의 총애를 받았지만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 외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인물로 다가가지 못했다. 디즈레일리는 초등학교 3학년 중퇴라는 학벌을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인 독서로서 지적능력을 쌓아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소설도 출간하고 당대의 의회에서는 누구도 그와 토론으로 대적할 수 없었다. 후에 옥스포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의 존경을 많이 받았다.
디즈레일리는 “공인은 공인 다움을 명확히 하는 데서 ‘공인의 인격이 뚜렷해지는 것’이라는 철학이 명확했고 이를 실천했다. 전화 한 통화로 수에즈 운하를 매입할 수 있는 자본동원능력이 있음에도 평생을 8만 파운드의 빚에 시달리고 살았으며 빚쟁이 들에게는 ‘자네들 덕분에 내가 열심히 글도 쓰고 게을러지지 않았다’고 감사했다.
그는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총리에서 물러난 후 소설을 출판하면서 인세를 받아 겨우 빚을 갚고 불과 25,000파운드짜리 전셋집을 5년 계약으로 런던의 하이드파크 근처에 얻어 살다가 2년후에 별세했다.
윤형돈 칼럼니스트/ 운을 부르는 인맥관리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