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독신청
  • My스크랩
  • 지면신문
FNTIMES 대한민국 최고 금융 경제지
ad

겸손함으로 삶이 탁월한 작품이 된 화가들의 화가, 왕의 남자 벨라스케스 [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65]

윤형돈 네트워킹센터장

기사입력 : 2025-11-11 06:00 최종수정 : 2025-11-11 09:54

겸손함으로 삶이 탁월한 작품이 된 화가들의 화가, 왕의 남자 벨라스케스 [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65]
17세기 스페인에서 화가는 천한 직업,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며 집안 장식을 위해서 붓질하는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 있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1599~1660)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예술의 위대함을 사람들이 몰라보는 안타까움이 더 컸다. 그는 ‘누가 봐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림을 그릴 거야, 그래서 화가도 고귀한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다짐했고 그 다짐을 현실로 만들었다.

왕의 고귀한 모습을 그리는 화가이자 귀족이 되었고 그가 그린 왕족의 아름다운 초상화 들은 전 유럽 왕가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그의 걸작들은 고아, 마네, 피카소 등 수많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200년 뒤에 출현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쳐 인상주의의 선구자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화가들의 화가’라 불렀다. 그러나 그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겸허한 마음으로 좋은 스승의 가르침을 얻다

스페인 세비아의 중산층 평민 집안에서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열한 살 때 지역 화가인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제자로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실력 좋고 인품까지 훌륭한 벨라스케스를 파체코는 얼마나 아꼈던지 자신의 딸과 결혼까지 시켰다. 파체코는 거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현명한 스승이어서 벨라스케스에게 글부터 먼저 가르쳤다.

당시 스페인에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림이 20%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화가들이 글을 못 읽었으니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었다. 파체코는 예술의 위대성과 ‘화가’란 고귀한 직업임을 강조하며 벨라스케스기 일생 일대를 화가로서 긍지를 갖는 동기를 부여했다. 벨라스케스는 탁월한 스승의 지도 덕분에 10대에 이미 세비아의 ‘일류 화가’가 되어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게 되었지만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스물세살 때 궁정화가를 지원하였는데 당시 열일곱살이었던 스페인 왕 펠리세 4세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자 말자 푹 빠져들었다. 질투에 찬 기존의 궁정화가들이 새파랗게 젊은 벨라스케스를 비난하자 펠리페 4세는 경연대회를 열었고 벨라스케스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하였다. 이제 스페인 왕실의 초상화는 벨라스케스만 그릴 수 있도록 지정했다. 왕의 남자가 된 벨라스케스는 고속 출세를 하며 우쭐해졌다

벨라스케스가 서른 살이던 1629년 당시 유럽 최고의 화가인 파울 루벤스가 스페인 궁정을 방문하자 스페인 왕실은 루벤스에게 왕실 가족의 초상화를 의뢰했다. 루벤스는 벨라스케스의 질투어린 불만을 알게 되자 벨라스케스가 그전에 그린 왕의 기마 초상화 구도를 살짝 바꾸어 훨씬 더 멋진 그림을 그려내었다.

그를 본 벨라스케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우물인 개구리이구나’. 벨라스케스는 그 길로 루벤스를 찾아가 자신의 텃세에 대해 사과하고 가르침을 구했다. 사실 루벤스는 젊고 유망하고 열심히 하는 벨라스케스가 마음에 들었었다. 루벤스는 스페인에 있는 내내 벨라스케스를 대동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었고 스페인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언했다. ‘자네의 재능은 정말 뛰어나, 하지만 경험이 부족하니 이탈리아로 와서 그림을 많이 보고 오면 훨씬 좋아질 거야.’ 벨라스케스는 그 길로 왕에게 간청하여 휴가를 얻어 1년반동안 이탈리아를 유학했다. 티치아노,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많은 선배 거장의 기술을 익혀서 돌아온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의 훌륭한 화가’에서 ‘세계 최고의 화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200년 선배

당시 유럽에서는 사실적으로 꼼꼼하게 표현할수록 ‘잘 그린 그림’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너무 꼼꼼하고 매끄럽게 그리면 오히려 그림이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사람은 뭔가를 볼 때 순간적으로 모든 세부사항을 파악하지 않고 자신이 집중하는 것과 빛과 조명 등에 따라 다른 순간적인 인상을 위주로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림이 사실적으로 보이려면 오히려 적당한 생략이 필요하다. 한 올 한 올 그려 넣는 작품보다 대담한 붓질 몇 번으로 표현한 옷감이 더 실감나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작품을 보고 예술과 과학에 관한 책들을 섭렵한 끝에 벨라스케스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이런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현실 그 자체보다는 보는 이가 느끼는 순간적인 인상들을 강조했던 200년 뒤 인상주의 후배들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존중

벨라스케스가 그린 궁정 광대<파블로 데 야돌리드>는 왜소증환자였고 당시 유럽 궁정에서는 일종의 장식품 같은 존재였지만 그는 똑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았다. 조롱도 동정도 없이 대상에 대한 침착한 관점과 이를 정확하게 반영한 묘사가 있을 뿐이었다. 벨라스케스가 약 서른 살일때부터 노예 파레하가 그의 작업을 20년간 도왔다.

파레하는 안료를 갈아 물감을 만들고, 나무와 천으로 캔버스를 만드는 등 그림의 밑준비를 주로 돕는 역할을 하면서 벨라스케스의 어깨너머로 그의 회화기법을 익혔다. 파레하의 그림 실력을 알아본 벨라스케스는 20년 동안 그와 동고동락하며 노예라 기 보다는 제자이자 동료와 같은 사이가 되었다. 1651년 벨라스케스는 파레하에 대한 존중과 경의의 의미로 파레하의 초상화를 아주 공을 들여 그렸다.

당시 그 작품을 본 사람들은 경탄과 함께 의구심을 나타낼 정도였다. ‘이 초상화는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인물을 보는 것 같다.’ 파레하의 초상화는 1971년에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영국의 개인 소장자에게서 590만 달러 (현재 가치 약 500억원)에 구입하면서 다시금 미술계에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저런 걸작을 왜 외국에 팔아 넘기는 걸 막지 못했냐고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벨라스케스는 이 그림을 전시 한 이듬해 인 1651년 파레하를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했다. 당시 노예를 풀어줄 때는 일반적으로 3~4년간 더 일하는 게 관습이었지만 파레하는 바로 자유의 몸이 되어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후 파레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여 1661년 가로 3미터가 넘은 대표작 <성 마테오의 소명>을 그리는 등 서양 미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성실하고 겸허한 인간관계가 베라스케스를 위인으로 만들다

벨라스케스가 섬겼던 왕 펠리페 4세는 사실 불행한 사람이었다 열여섯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가 물려받은 제국은 속 빈 강정이었다. 오랜 종교전쟁으로 경제와 민심이 피폐해져 기울어가는 무적함대 스페인을 다시 일으키기는 역부족이었다. 갑자기 사망한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는 집권 초기부터 대신들의 견제에 많이 시달렸다. 이런 환경에서 미술애호가인 펠리페 4세에게 벨라스케스는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친구이자 버팀목이 되었다. 서로가 평생의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이다.

1644년 사랑하던 왕비가 죽고 2년뒤 장남마저 세상을 떠나자 펠리페4세는 절망에 빠졌고 그를 진심으로 위로해준 사람이 친구이자 가족 같았던 벨라스케스였다. 그 무렵부터 벨라스케스는 궁정의 각종 일을 맡아 처리하기 시작하여 1652년에는 궁정의 ‘마스터 키’를 관리하는 고위 행정직까지 올랐다.

펠리페 4세가 잠시라도 벨라스케스가 그의 곁을 떠날 수 없게 하면서 왕의 전쟁터에도 따라다니게 되었다. 궁정 화가로서의 역할보다는 왕을 보좌하는 비중이 더 많아졌다. 왕의 신임을 온 몸에 받은 벨라스케스는 1659년 예순살이 되던 해 각고의 노력 끝에 산티아고 기사단에 합류하면서 고귀한 신분이 되었고 그 이듬해 사망했다.

벨라스케스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태어났지만 스승을 만나면 겸허한 마음으로 배움을 구하고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주를 갈고 닦았다. 최고의 자리에서도 결코 오만하지 않고 겸손했다. 인간에 대한 존엄심을 담아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왕가 뿐만 아니라 노예의 초상화도 그렸으며 노예의 재능을 발굴하고 그를 해방하여 미술사에 유명 화가로 이름을 남기도록 했다.

펠리페 4세가 2년간이나 벨라스케스가 이탈리아에 유학하도록 허락한 것도 그의 품성에 기인한바가 크다. 그의 작품들은 400년 가까이 흐른 오늘 날에도 수많은 관람객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캔버스에 그려진 결과물에는 화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본 시각이 담겨있다. 벨라스케스의 미술은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겸허함과 좋은 품성이 바탕이 된 자기의 시각으로 탁월하게 그려내었고 그의 삶도 탁월한 작품이 되었다

출처 및 인용: 명화의 발견-그때 그 사람(성수영 지음)

윤형돈 칼럼니스트/운을 부르는 인맥관리연구소 대표

데일리 금융경제뉴스 FNTIMES - 저작권법에 의거 상업적 목적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 금지
Copyright ⓒ 한국금융신문 & FNTIMES.com

가장 핫한 경제 소식! 한국금융신문의 ‘추천뉴스’를 받아보세요~

오피니언 다른 기사

1 저축은행 본업 막아놓고 포용금융을 말할 수 있나 [기자수첩] 본업을 막아놓고 포용을 말할 수는 없다. 저축은행의 본업은 유가증권 투자가 아니라 서민 대출이다. 그러나 6.27 대출 규제 시행 1년, 총량에 묶인 서민금융 최전선 저축은행은 요즘 대출이 아닌 주식으로 돈을 번다.정부는 포용금융을 국정 기조로 내걸었다. 금융당국 역시 지난해 저축은행 역할 제고 방안을 내놓으며 서민금융 공급 확대를 주문했고, 올해부터는 정책서민금융 손질에도 나섰다.하지만 중·저신용자 대출을 본업으로 하는 저축은행에 일률적 총량 규제를 적용하는 순간, 포용의 통로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한쪽에서는 공급을 늘리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총량을 조이는 정책이 계속되는 것이다.수도권 주택담보대출 한도 6억원 2 ‘3%룰’ 함정에 빠진 중복상장 가이드라인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가 발표한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을 둘러싸고 자본시장이 술렁이고 있다. 모회사 이사회에 주주충실의무를 명문화하고 중복상장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점은 분명 진일보한 조치다. 그러나 중요한 대목에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순간에 엑셀을 밟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중복상장 금지’라는 간판은 걸었지만 정작 일반주주를 보호할 설계는 여전히 허술하다는 얘기다.금융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의 중복상장 비율은 2025년말 기준 전체 시가총액 대비 11.2%다. 미국(0.05%) 대만(2.7%) 일본(4.0%)은 물론 중국(2.4%)보다도 월등히높다. 한국금융신문이 시가총액 상위 1182개사를 계산해보니 16.2%에 달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 3 이범희 NBH캐피탈 대표 “매년 텐배거 기업 발굴 저력…올해 ROE 20% 목표” "몇 년에 한 번 나오기도 어려운 텐배거(Ten-bagger·현재보다 10배 이상 성장할 잠재력) 기업을 매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매년 수익성이 우상향 해온 만큼 올해도 ROE 20% 달성을 목표로 삼았습니다."이범희 NBH캐피탈 대표는 한국금융신문과의 인터뷰에서 NBH캐피탈의 저력과 올해 목표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NBH캐피탈은 투자, 기업대출, 자동차리스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여신전문금융회사다. 영업자산은 1310억원으로 규모는 작지만 작년 '잭팟'을 기록한 달바글로벌 투자조합 주요주주로 이름을 알리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작년 달바글로벌에 이어 올해 5월에는 웨어러블 로봇 제조기업 코스모로보틱스도 '텐배
ad
ad

한국금융 포럼 사이버관

더보기

FT카드뉴스

더보기
환전·로또·육아휴직까지 하반기부터 달라지는 제도 TOP11
[그래픽 뉴스] 은퇴후 30년 부모님 세대의 생존전략
[그래픽 뉴스] 퇴근 후 주차했는데 수익 발생? V2G의 정체
[그래픽 뉴스] “전쟁 신호를 읽는 가장 이상한 방법, 피자 주문량”
[그래픽 뉴스] 트럼프의 ‘타코 한 입’에 흔들린 시장의 비밀

FT도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