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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 벌어 귀향한 ‘연어의 삶’ …한국 최고 롯데타워 세웠다

홍지인 기자

helena@

기사입력 : 2021-11-08 00:00

탄생 100년 맞은 故 신격호 롯데 창업주
혈혈단신 日 건너가 재계 5위 그룹 일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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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융신문 홍지인 기자] ‘거화취실(去華就實)’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리를 취한다는 뜻이다. 고(故) 신격호닫기신격호기사 모아보기 롯데그룹 명예회장 집무실 액자 속에 쓰여진 사자성어다.

고 신격호 명예회장은 자산 규모 100조 원 재계 5위 롯데그룹을 만든 대표적 1세대 창업가지만 화려함보다 실속을 추구한 조용한 거인이었다.

홀수 달은 한국,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물며 그룹을 경영해 ‘대한해협의 경영자’라고도 불린 고인은 일본에서 성공한 한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귀화하지 않고 끝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했다.

한국 국적으로 일본에서 사업을 하다보니 어려움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았지만 고인은 ‘본명 : 신격호, 국적 : 대한민국’이라고 분명하게 새겨진 주민등록을 끝까지 유지했고, 대한민국 기업인으로서 기억되기를 원했다.

고인의 장녀인 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전 이사장은 고인 1주기 추모 영상에서 “어린 시절 낯선 타국에서 힘들게 사업을 하시면서도 늘 고국과 고향을 생각하고 그리워하셨다”며 “그런 마음이 롯데라는 그룹을 일구고 한국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혈혈단신 도일한 조선 청년, 대한민국 5위 부자가 되다

1921년 경남 울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청년 신격호는 큰 꿈을 이루고자 일제강점기인 1941년 혈혈단신으로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유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와세다 고등공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신용과 성실함을 본 이들 도움으로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화장품 사업 등을 거쳐 1948년 롯데를 설립했다.

당시 일본에서 풍선껌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는데, 롯데는 이 흐름을 타고 껌이라는 단일 품목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경쟁 업체 제품에 비해 롯데 껌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제품에 대한 신뢰도와 시장 평가도 높아졌다.

1960년대에는 일본 껌 시장의 70%를 장악했다. 롯데 껌 성공을 발판으로 고인은 1959년 롯데상사를 설립하고 이어 1961년 롯데부동산, 1967년 광고회사인 롯데아도, 1968년 롯데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을 잇달아 세웠다. 롯데는 일본 유통업계 강자로 성장했고 이는 고국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1965년 한·일 수교가 이루어지자 고인은 1967년 롯데제과를 창립해 모국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이후 당시 박정희 대통령 제안에 따라 기존 반도호텔 자리에 소공동 롯데호텔을 설립하게 된다.

박 대통령은 단순히 호텔 설립을 제안했지만 고인은 고민 끝에 세계적 호텔 건립 이상의 목표를 세웠다. 국내 최초로 로열티 없는 독자적 호텔 브랜드 ‘호텔 롯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300~400실 규모면 일류 호텔 소리를 듣던 1970년대 초에 고인은 40층, 1000실 규모 호텔에 더해 백화점과 오피스타운까지 동시에 건설하는 전무후무한 복합개발을 구상했다.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상징과도 같은 ‘복합개발’의 시작이었다.

고인은 서울 소공동, 잠실, 부산 등지 복합개발을 통해 지역 종합시설 구축하고 이를 통한 경제 활성화를 가능하게 했다. 주변에 참외밭뿐이었던 황량한 잠실 일대를 테마파크와 호텔, 백화점, 쇼핑몰로 복합개발해 단번에 재계 주목을 받았다.

잠실 개발 계획에 대해 당시 임직원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자 고인은 “상권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상품과 훌륭한 서비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잠실 일대는 곧 명동만큼 번화한 곳이 될 것”이라고 확언했고 이는 현실이 됐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 시도를 성공으로 증명하는 고인의 태도는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된 롯데월드타워 완공까지 이어졌다.

롯데월드타워는 123층, 높이 554.5m로 2021년 상반기 기준 한국 최고층 건물이자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2019년 기준 한해 방문자 수가 1300만 명에 달하며 한국의 새로운 명소로 거듭났다.

고인은 평생 숙원사업이었던 롯데월드타워 건설을 진두지휘하며 단순히 롯데가 아닌 대한민국의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내는 꿈을 이뤄냈다.

롯데월드타워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고인은 태어난 지 100년을 맞아 흉상과 기념관으로 그 안에 영원히 머물게 됐다. 롯데는 지난 1일 롯데월드타워 1층에 신격호 명예회장 흉상을 설치하고 5층에는 ‘상전 신격호 기념관’을 만들었다.

◇ 직접 일군 자산을 베푸는 ‘연어의 삶’

고인은 1983년 “우수한 자질이 있음에도 가난한 환경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사랑의 온정을 베풀어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고, 성취한 학문적 지식을 국가와 인류사회에 기여하도록 하는 장학사업을 전개하겠다”며 삼남장학회(현 롯데장학재단)를 설립했다.

롯데장학재단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기초과학 전공자를 중점 지원하는 장학재단이다. 지식정보화 시대를 이끌어 갈 인재를 육성한다는 목표 아래 집안 형편이 어려운 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한다. 재단 설립 이후 올해까지 지원한 장학금은 약 800억 원, 수혜자는 5만 명을 넘었다.

생전 고인은 “재단 장학금으로 공부한 수혜 학생들이 재단에 감사 편지를 보내올 때가 종종 있다”면서 “나는 그 편지를 읽는 게 적잖은 즐거움이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집안형편이 아주 어려운 어느 학생이 훗날 과학자가 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진심으로 기뻤고, 기업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보람도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은 남의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어려움을 공감하며 1994년 외국인 근로자를 돕기 위한 롯데복지재단도 설립했다. 롯데복지재단은 한국에서 일하며 어려움을 겪은 외국인 근로자와 조선족 동포들을 돕는 활동을 펼쳐왔다.

롯데복지재단은 1994년부터 2020년까지 10만여 명에게 165억 원을 지원했다. 산업재해 및 임금 체불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지원과 외국인 근로자 상담소 및 쉼터뿐 아니라 임금체불, 사기 등으로 피해를 외국인 근로자를 돕는 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이 외에도 차별과 무시를 당하며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우리나라 선수들 어려움에 공감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다. 대표적 프로복서 홍수환 선수를 후원했는데, 그가 일본 복서를 이기고 우승하자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부터 일본 롯데 본사까지 도쿄 한복판을 카퍼레이드하고, 당시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인 현금 100만 엔을 주며 격려한 일화는 유명하다.

바둑계 ‘불멸의 승부사’ 조치훈 9단에게도 매달 하숙비와 생활비를 지원했고 일본 프로야구 전설인 재일교포 장훈 선수가 당시 3000안타라는 대기록을 앞두고 일본 구단과 감독들 차별로 경기를 뛸 수 없게 되자 고인은 자신이 구단주로 있던 당시 롯데 오리온즈에 장훈 선수를 영입해 대기록을 달성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권성원 차의과대학 석좌교수는 “고인은 맨몸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모든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사업을 성공시켰고, 보릿고개 시절 귀한 외화를 가지고 모국으로 돌아왔다”며 “고향을 찾아가는 연어의 삶을 닮았다”고 말했다.

홍지인 기자 helena@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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