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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K-콘텐츠보다 중요한 것은 K-룰이다 [장준환의 AI법 네비게이터④]

장준환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 2026-05-21 16:42 최종수정 : 2026-05-22 10:02

“기술보다 먼저 설계해야 할 것은 인간이다.”

얼마 전 뉴욕에서 한 투자자와 AI 콘텐츠 기업에 대해 이야기하던 자리였다. 그는 그 회사가 얼마나 많은 영상을 만들 수 있는지, 얼마나 빠르게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 콘텐츠의 학습 데이터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리고 나중에 권리 분쟁이 생기면 누가 책임집니까?”

사진출처: Pixabay, AI Data Network

사진출처: Pixabay, AI Data Network

AI 콘텐츠 시대, 경쟁의 기준이 바뀌고 있다

이 질문은 지금 AI 시대 콘텐츠 산업의 본질을 정확히 찌른다. 과거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은 누가 더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더 강한 팬덤을 확보하느냐에 있었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콘텐츠 생산 방식을 바꾸면서 경쟁의 중심은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콘텐츠 그 자체만이 아니다. 그 콘텐츠가 어떤 데이터 위에서 만들어졌는지, 누구의 창작물을 학습했는지, 어떤 권리 구조 안에서 유통되는지, 그리고 수익이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되는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K-콘텐츠의 성공, 그러나 룰은 누가 만들고 있는가

한국은 지난 20여 년 동안 K-콘텐츠의 성공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왔다. K-팝, K-드라마, K-영화, K-웹툰, K-푸드는 세계 시장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만들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한국이 만든 것은 주로 콘텐츠와 브랜드였다. 그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어떻게 보호되고, 재가공되고, 투자되고, 수익화되는지에 대한 규칙은 대부분 글로벌 플랫폼과 해외 자본의 언어로 설계되어 왔다.

AI 시대에는 이 문제가 더 선명해진다. 생성형 AI는 K-콘텐츠의 확성기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K-콘텐츠의 무단 채굴기가 될 수도 있다. 한국 아티스트의 목소리, 배우의 얼굴, 드라마의 서사 구조, 웹툰의 그림체, K-팝의 안무와 스타일은 모두 AI 학습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누군가가 이를 학습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었을 때 원래 창작자는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플랫폼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팬덤의 2차 창작과 AI가 만든 상업적 복제물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예컨대 아이돌의 음성을 학습한 AI 보컬, 배우의 얼굴을 활용한 가상 광고, 웹툰 작가의 그림체를 모방한 생성 이미지, K-드라마의 서사 구조를 학습한 자동 각본 서비스가 등장했을 때, 한국은 이를 단순 침해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라이선스 시장으로 설계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법은 창작의 발목을 잡는 장치가 아니라, 창작자가 새로운 시장에서 정당한 몫을 가져가게 만드는 산업 설계의 언어가 된다.

사진출처: Pixabay, AI Data Law

사진출처: Pixabay, AI Data Law


문화 강국의 다음 조건은 ‘K-룰’이다

이제 K-콘텐츠보다 중요한 것은 K-룰이다. 여기서 말하는 K-룰은 단순히 한국식 규제를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한국 콘텐츠가 세계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가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법적, 기술적, 자본적 구조를 설계하자는 뜻이다. 저작권, 데이터 학습권, 퍼블리시티권, 음성권, 초상권, 플랫폼 책임, AI 생성물 표시 의무, 수익 배분 구조, 라이선싱 모델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콘텐츠가 문화라면, 룰은 그 문화가 경제가 되는 방식이다.
그동안 한국은 콘텐츠를 만드는 데 강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콘텐츠가 돌아가는 시장의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콘텐츠만 잘 만드는 나라는 팬덤을 얻을 수 있지만, 룰을 만드는 나라는 산업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미국의 플랫폼 기업들이 강한 이유도 단지 기술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들은 기술을 시장의 규칙으로 바꾸는 데 능하다. 계약, 약관, 데이터 정책, 알고리즘, 구독 모델, 광고 수익 배분, 지식재산권 구조를 통해 기술을 산업 질서로 만든다.

한국이 K-콘텐츠의 성공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K라는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고 해서 그 가치가 자동으로 한국의 산업적 주도권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AI 시대에는 그 분리가 더 빨라질 수 있다. 한국이 콘텐츠를 만들고, 글로벌 플랫폼이 데이터를 축적하며, 해외 기업이 AI 모델을 훈련시키고, 다시 세계 시장에서 그 결과물을 판매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면 K의 인기는 커져도 한국의 몫은 줄어들 수 있다.

사진출처: Pixabay, AI Data Network

사진출처: Pixabay, AI Data Network


따라서 AI법은 더 이상 단순한 기술 규제의 문제가 아니다. AI법은 문화정책이고, 산업정책이며, 국가 전략이다. AI 시대의 K-콘텐츠 문제를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사업,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기술정책, 법무부의 사후 분쟁 처리로 나누어 보는 순간, 한국은 이미 플랫폼이 설계한 룰 안에서 뒤늦게 대응하는 나라가 된다. 데이터는 기술의 문제이면서 권리의 문제이고, 콘텐츠는 문화의 문제이면서 자본의 문제이며, 플랫폼은 유통의 문제이면서 국가 경쟁력의 문제다.

사진출처: Pixabay, AI Economy Chart

사진출처: Pixabay, AI Economy Chart


필자는 최근 출간한 신간 《K가 죽어야 K가 산다》에서 K가 더 이상 감성적 구호나 브랜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썼다. 제목은 도발적이지만,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K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K를 다음 단계로 보내자는 것이다. AI 시대에는 이 문제의식이 더욱 절실해진다. K가 살아남으려면 콘텐츠를 넘어 규칙이 되어야 한다.

이제 한국은 물어야 한다. K-콘텐츠는 누가 만들고, 그 데이터는 어디에 축적되며, 그 권리는 어떻게 보호되고, 그 수익은 어떻게 배분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 규칙은 누가 만드는가. AI 시대에 K가 계속 노래와 드라마의 이름으로만 남는다면, 박수는 한국이 받고 돈과 데이터는 다른 곳에 쌓일 것이다. 한국이 진정한 문화 강국이 되려면 이제 K-콘텐츠를 넘어, 콘텐츠가 작동하는 K-룰을 만들어야 한다.

AI 시대, K-콘텐츠보다 중요한 것은 K-룰이다 [장준환의 AI법 네비게이터④]이미지 확대보기


장준환 뉴욕 변호사 (Private Wealth & Investment)
충북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겸임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 고문변호사

미국 뉴욕주 프라이빗 웰스 로펌의 대표 변호사로 자산 구조와 투자전략 설계 전문가다. AI를 비롯한 IT 관련 법률 지식에 정통해 충북대 컴퓨터공학과 겸임교수와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고문변호사를 맡고 있다.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개발사업과 글로벌 갤러리 운영도 하면서 다양한 사회·문화 활동도 하고 있다. 차세대 한인 리더로서 AI 시대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인프라를 구축해 입법·제도화한다는 비전을 갖고 오는 2028년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를 준비 중이다.

장준환 칼럼니스트/뉴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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