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코스콤 CHECK, 2016년 이후 유가 흐름
지난 10월까지만 해도 유가 100불 시대를 점치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순식간에 많은 게 바뀐 것이다.
유가는 10월 29일부터 이달 13일까지 12 영업일 연속으로 떨어졌다. 이는 역대 최장기간 하락 기록이었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10월 3일 기록한 전고점인 76.41달러에서 20일 53.43달러까지 급락하면서 무려 30%나 빠졌다. 단기간에 유가가 급락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했다.
유가가 고점 대비 20% 넘게 빠지는 시점부터 투자자들은 '약세장 진입' 가능성을 거론했다. 지난 13일 WTI의 일일 낙폭 7.1%는 2015년 9월 1일(7.7%) 이후 가장 큰 것이었다.
■ 유가급락..미국의 힘이 공급 패러다임 전환시켜
유가 하락의 원인으로 공급 과잉과 함께 수요 부진 가능성이 많이 주목됐다.
우선 이달 초순인 11월 9일 미국의 원유재고가 4억 4200만 배럴를 기록하면서 연중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공급 과잉에 대한 관점을 강화시켰다.
이란, 사우디 등 중동 산유국 관련 이슈로 공급 문제에 접근하다가 미국 재고의 급증 소식에 당황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원유재고는 9월 중순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란 제재와 관련한 공급 축소로 인한 유가 상승 가능성은 한국을 포함한 8개국에 대한 '면제 조치'로 크게 누그러졌다. 미국이 이번 유가 급락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란 문제는 미국이 JCPOA(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서 탈퇴하면서 증폭되기 시작했다.
JCPOA는 2015년 7월 오스트리아에서 체결된 이란과 강대국들간의 핵 문제에 관한 합의로 통상 이란 핵협정이라고 부른다. 이란이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과 EU가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게 내용의 골자였다.
하지만 이란 사태가 실질적으로 원유 공급을 크게 줄이지 못했다. 미국이 JCPOA에 탈퇴한 5월부터 이란의 수출이 일평균 100만 배럴 내외 감소했으나 이 기간 사우디가 생산을 늘리면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산유량은 120만 배럴 늘어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러시아 역시 5월 이후 일일 생산량을 50만 배럴 가량 늘렸다.
이후 미국의 재고 증가와 생산량 확대가 유가의 본격 하락에 큰 역할을 했다. 이달 들어 미국의 일일 생산량은 전년에 비해 20% 가량 급증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미국은 10월 중순 이후 증산에 박차를 가하면서 10월말부터 이어진 유가 급락을 견인했다.
■ 유가급락..수요측면 우려는 글로벌 경기 둔화와 연관
수요 측면의 유가 하락 가능성 강화는 글로벌 경기 둔화와 연관돼 있다.
미중 무역분쟁이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글로벌 경기에 대한 전망이 약화되면서 원유 수요 탄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관점이 대두됐다.
일부 신흥국의 경기 불안 지속, 미국의 금리인상 지속 전망 등도 수요 부진에 힘을 보탰다.
글로벌 경기 악화 우려는 안전자산선호에 따른 달러 강세에도 힘을 실어줬다. 달러인덱스는 9월 20일 93.912에서 96 위로 올랐다. 달러화 강세는 유가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OPEC은 원유 수요에 대한 전망을 계속 낮췄다. OPEC은 최근 보고서에서 내년 세계 원유수요 전망을 일평균 1억8만 배럴로 7만배럴 낮췄다. 규모의 조정폭은 크지 않았지만, 4개월 연속으로 전망치를 낮췄다. 이러자 추가적인 전망치 하향 가능성도 대두되면서 수요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 유가급락..금융적 요인 크게 작용해 향후 반등·추가 하락 가능성 열어둬야
유가가 크게 움직일 때는 금융시장의 투기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일순간 하락세가 힘을 받을 때는 추세적인 매도에 힘을 주는 금융시장의 플레이가 낙폭을 키운다.
국제금융센터는 "유가 하락으로 풋옵션 매수자의 권리행사가 가능해짐에 따른 매도자인 스왑 딜러가 선물시장에서 숏 포지션을 구축해 낙폭을 키웠다"면서 "스트라이크 프라이스, 즉 행사가격 $65, $60, $55 풋옵션의 미결제약정이 많아 유가 낙폭이 이 레벨을 전후로 확대된 측면이 있다"고 풀이했다.
풋 매수 플레이어의 매도 헤지가 유가 하락을 부추기면 이는 추가적인 매도헤지를 불러 일으키고 유가는 더 떨어질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유가 급락은 매수 세력들의 손절매와 함께 알고리즘 플레이 작동을 강화시켜 낙폭을 더욱 키울 수도 있다. 시세를 추종하는 알고리즘은 유가가 지지선을 뚫고 내려갈 때마다 매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최근 뉴욕 주식시장 등에서 주가가 급락할 때마다 일각에서 알고리즘 트레이딩의 폐해를 언급하는 것처럼 원유시장에도 이 같은 플레이의 위세가 상당하다는 관점이 적지 않은 것이다.
뉴욕상업거래소는 WTI 선물옵션의 비상업 매수포지션이 이달 13일 현재 55.4만 계약으로 지난 4월 중순 이후 35% 줄어들어 2년래 최저치로 감소했다고 밝힌 바 있다. 비상업 매도포지션은 9월말 6.5만계약에서 13일까지 12.4만계약으로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다만 유가가 오르기 시작하면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시스템 트레이딩이 이번엔 매수 포지션 쪽으로 쏠리면서 급하게 낙폭을 줄여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최근 낙폭 과대에 따른 되돌림 가능성 등도 감안해야 한다는 진단은 많다.
국금센터는 "최근 유가 급락세는 수급여건을 감안해도 과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술적 반등이 가능한 시점"이라며 "2012년 이란 제재 당시에도 유가가 급등락 현상을 나타냈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지난 2012년에도 7월 1일 이란제재를 앞두고 WTI는 사우디 등의 증산으로 5월초 106달러에서 6월 28일 77달러로 27% 급락한 후 약 2개월 후인 9월 중순 $99달로 29% 반등한 바 있다. 다만 유가가 더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센터는 "유가 반등시 시스템 트레이딩의 매수포지션 구축에 따라 빠르게 올라갈 수도 있지만, 행사가격 $50 풋옵션의 미결제약정이 상당해 WTI가격이 40달러대로 하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풀이했다.
■ 유가급락..트럼프닫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트윗을 통해 유가의 추가 하락을 후원했다. 사우디에 대한 감사함마저 표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1일 트윗에서 "유가가 더 낮아지고 있다. 좋다! 미국과 세계에 큰 감세를 실시한 것과 같다. 즐겨라. 유가가 82달러에서 54달러로 내려왔다. 사우디에 감사한다. 하지만 더 내려가 보자"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 뒤 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아메리카 퍼스트"와 같은 메시지를 달았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선 금리 인상에 반대해 온 트럼프 대통령이 유가 하락을 견인한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표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원유 생산량 증가와 재고 증가 속에 금리인상을 반대한 트럼프 대통령이 유가에 하락 압력을 가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증권사의 한 채권딜러는 "일각에선 유가 급락의 원인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꼽고 있다. 그가 사우디 등을 조종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다른 딜러는 "알게 모르게 트럼프의 힘이 작용하는 곳이 많은 것으로 본다. 그가 세계의 왕 노릇을 하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추론했다.
운용사의 한 매니저는 "유가 급락에 트럼프 공헌이 크다. 저유가를 통해 OPEC 카르텔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며 "트럼프는 자신의 입으로 저유가가 전세계인에게 감세 혜택을 주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21일 일부 미국 언론은 연준 관계자의 말을 인용, 유가 급락이 금리인상 속도를 낮출 수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마켓뉴스인터내셔널(MNI)은 "연준은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인 2% 근처에서 고점을 칠 전망인 데다 최근 유가 급락으로 물가상승률이 내려갈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12월 금리인상은 거의 확실하지만 인상중단 관련 논쟁은 내년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 회의에서 더 활발해지기 시작할 것이며, 6월까지는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준은 최근까지 금리인상에 반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개의치 않고 금리를 올리고 있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유가 하락을 유도해 연준의 스탠스에 제동을 걸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의구심도 엿보였다.
장태민 기자 chang@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