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구조조정 이후 여파가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저축은행 예금자 보호한도를 축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김석동 금융위원장
“업권마다 리스크 정도를 감안해 예금보호 한도를 차등화할 순 있지만 지금 당장 시행할 경우 일대 혼란이 올 것이다.” A저축은행 대표이사
은행과 저축은행 등 업권별로 예금자 보호한도를 차등화하는 방안이 추진돼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현행 예금자보호법상 은행, 저축은행, 보험사의 금융상품은 해당 금융사의 파산 시 정부가 1인당 원금과 이자를 5000만원까지 지급해 주도록 돼 있으나 이를 업권별로 차등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경우 보장한도가 많은 은행 쪽으로 예금이 이동하는 등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정치권에 이어 예금보험공사 수장인 이승우 사장이 저축은행에 대해서 예금보장 한도를 하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면서 또다시 이를 둘러싼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융감독 수장인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저축은행의 구조조정 여파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예금자 보호한도를 축소하면 축소분 만큼 예금이 대거 인출되면서 저축은행 경영에 더욱 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저축은행업계 역시 예금보호한도 차등화를 추진하더라도 업계가 위기에서 벗어난 후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예보, 예금보호한도 차등화 검토
저축은행 부실 사태가 계속되면서 현재 5000만원으로 정해진 저축은행의 예금자보호 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저축은행들이 본연의 경쟁력을 쌓기보다는 영업정지되거나 파산하더라도 원리금 5000만원까지 보장해 준다는 예금보호 제도에만 의존해 무분별하게 예금을 늘린 게 부실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금융감독 당국과 저축은행업계에 따르면 지난 7월 말 기준 원리금 합계 5000만원 초과 예금자는 전국적으로 약 17만4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가입한 예금은 총 12조7000억원으로 이 가운데 예금자 보호를 받지 못하는 5000만원 초과액은 4조1000억원에 달했다.
지난 2008년엔 11.9%였으나, 2009년에 10% 미만으로 떨어진 이후로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은행 및 저축은행의 예금보호 한도는 원래 2000만원이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직후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일시적으로 전액 보장제로 바뀌었다. 그랬다가 외환위기에서 벗어난 2001년부터 5000만원으로 상향 조정돼 줄곧 유지되고 있다.
2001년은 저축은행들이 상호신용금고라는 명칭을 쓰고 있을 때였다. 정부는 위축된 상호신용금고의 영업을 활성화한다는 취지로 은행과 똑같은 5000만원으로 예금보호 한도를 정했다. 2000년 ‘진승현 게이트’와 ‘이용호 게이트’에 상호신용금고가 연루되면서 신뢰가 추락해 경영이 어려워졌다는 업계의 요구도 반영됐다. 똑같은 예금인데 수신기관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도 작용했다.
당시 경제부처 수장이었던 진념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4월 저축은행 청문회에 출석해 “예금보호 한도를 상향 조정하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그는 “전문가들이 (IMF 외환위기 직후 전액보장제에서) 부분보장제로 돌아가면 대거 예금 인출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해서 이에 대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절충안으로 5000만원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 솔로몬저축銀, 웬만한 지방은행보다 규모 커져
예금보호 한도를 늘린 이후 저축은행들의 자산은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자산가들이 5000만원씩 나눠 저축은행을 찾았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 일대에 저축은행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도 이때쯤이다. 서민금융기관으로서의 색깔이 변색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형 저축은행이 수조원대로 자산을 불려 지방은행보다 덩치를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예금보호 한도 덕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자산 규모로 한국계열 3개 저축은행(7조3000억원)과 솔로몬계열 3개 저축은행(7조2000억원)은 제주은행(3조2000억원)보다도 덩치가 크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서민 금융기관이라면 자산이 2000억~3000억원 정도인 게 합당한데 공룡처럼 비대해 진 것은 예금보호제도가 바람막이를 해준 덕분”이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경영 상태가 나빠지면 예금이 덜 들어와야 이론에 맞지만 예금보호 한도 덕분에 고금리로 예금을 끌어모을 수 있었고 방만 경영으로 이어졌다”며 “저축은행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유도한 셈”이라고 말했다.
저축은행들은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들어오는 예금을 굴릴 곳이 없어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에 거액을 투자했다가 부실의 길로 들어섰다.
한 민간경영연구소 관계자는 “은행과 똑같이 5000만원인 예금보호 한도가 부실 저축은행들의 퇴출을 막는 결과를 낳았다”며 “금융 업종별로 재무안정성이 다르기 때문에 업종별로 예금자 보호한도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예금자 보호제도가 공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저축은행이 영업정지되거나 파산하면 다른 저축은행 예금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낸 예금보험료를 모은 예금보험기금을 투입해 뒤처리를 해야 한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정부는 지난 3월 저축은행 외에 은행·보험사 등 다른 금융회사 예금자가 낸 예금보험기금을 투입했고, 공적자금도 일부 집어넣었다. 파산한 저축은행과 전혀 무관한 금융회사 예금자와 납세자의 돈이 들어가는 것이다.
◇ 예금자 보호한도 차별화 쉽지 않을 듯
이렇게 문제점이 뚜렷하지만, 금융위원회는 당분간 예금보호 한도를 축소할 계획이 없다고 못 박았다. 당장 예금보호 한도를 낮추면 초과분을 빼내려는 ‘뱅크런(예금인출사태)’이 벌어질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저축은행중앙회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규제가 강화되고 영업 활동이 제약받고 있는 상황에서 예금보호 한도가 축소되면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보내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찬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올해 저축은행 구조조정이 일단락되고 안정을 찾고 난 뒤에 장기 발전 방향 차원에서 한도 축소를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KDI 강동수 금융경제연구부장은 “저축은행만 차별해서 한도를 줄이는 것은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정치적 이슈여서 실현 가능성이 적다”고 말했다.
예금보호 한도를 축소한다고 해도 실효성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를테면 2000만원으로 낮춘다면 5000만원씩 나눠 예치하던 예금을 보다 많은 저축은행에 2000만원씩 쪼개는 불편함만 감수하면 된다. 전체 저축은행의 예금 합계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일부 전문가들은 저축은행의 예금보험 한도를 낮추는 것보다는 예금보험료를 인상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예보는 저축은행들이 내는 보험료율(예보료율)을 기존 0.35%에서 올해 0.05%포인트 올려 0.4%를 받고 있다.
예금보험공사 관계자는 “예금보험제도가 있으면 금융회사에 대한 신뢰가 구축되는 반면, 도덕적 해이가 커지면서 궁극적으로는 시장의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며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 예금 보호 한도 ‘의무 고지법’ 1년째 국회서 ‘낮잠’
한편 금융기관이 고객에게 예금 보호 한도 등을 의무적으로 고지하도록 한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이 1년 가까이 국회에서 잠들고 있어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정부는 금융회사 직원이 예금자에게 보호 한도 등 예금보험관계(보험자-피보험자)를 의무적으로 설명하도록 한 예보법 개정안을 지난해 11월 국회 정무위원회에 입법 발의했다. 현행 예보법으로는 금융회사가 고객에게 보호 한도 등을 설명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 개정안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5000만원 초과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예금자에게 예금보호 여부와 보호한도(원리금 합계 최대 5000만원)를 설명하고 예금자의 자필 서명을 받아 이를 증빙하도록 의무화했다.
또 예금보험공사는 금융회사의 설명 의무 이행 여부를 조사하고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금융회사에 대해 200만원 한도 내에서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예금자는 해당 예금액의 보호 여부와 이에 따른 위험성을 사전 인지해 예금액을 조절할 수 있으며, 금융회사는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예금자와의 법적 공방을 피할 수 있다.
관련 법이 마련되지 않자 금융회사들은 거래통장 첫장에 예보법 보호 한도 규정을 적시해 책임을 면피하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5000만원 이하 예금자에게는 비교적 충실히 설명하는 편이지만 5000만원 초과 예금자에게는 예금액을 보호 한도 내로 줄일 수 있어 설명을 기피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시중은행보다 리스크가 큰 저축은행업계에 개정안이 발의되기 두달 전부터 자율적으로 예금자에게 보호 한도 등을 설명토록 했지만 이 마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개정안은 올 초 터진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 때도 처리되지 못했다. 당시 국회는 눈 앞에 민심잡기에만 골몰한 탓에 저축은행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는 ‘저축은행 구조조정 특별계정’ 관련 예보법 개정안만 처리했다.
이로 인해 5000만원 초과 예금자들이 또 다시 대거 피해를 입는 사태로 이어졌다. 지난 18일 영업정지된 토마토, 제일 등 7개 저축은행의 5000만원 초과예금자(개인+법인)는 2만5766명, 피해액은 1560억원에 달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올 초 예금자에게 예금 보호 한도를 의무 고지하도록 한 법안을 처리했다면 5000만원 초과 예금자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실효성 있는 법안을 미리 처리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김의석 기자 eskim@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