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들은 유동성 확보를 위해 필요할 때 언제라도 은행에서 인출이 가능하도록 은행과의 약정으로 일정금액의 대출한도를 보유하고 있다. 그 중 사용하지 않은 한도를 미사용한도라고 한다.
이미 지난해부터 일부 적용됐지만 오는 2006년말 새로운 충당금제도가 본격 도입되고, 2007년말엔 바젤Ⅱ가 시행되면 미사용한도에 대해서도 리스크를 측정해야 하기 때문에 은행으로서는 결과적으로 자본 및 충당금 부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미사용한도는 리스크로 반영되지 않아 은행과 기업이 불필요하게 한도를 늘려왔다. 앞으로 사용하지 않는 한도에 대해선 과감하게 줄이거나 미사용한도에 대해 수수료를 부과하는 등 한도관리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은행권 미사용한도 약 240조원=지난해 말 금융감독원에 집계된 국내 은행의 미사용약정 금액은 모두 약 270조원에 달한다.
지난해 금감원은 예상손실액(EL) 기준의 새로운 충당금 제도 도입에 앞서 사전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미사용한도에 대한 충당금 적립을 권고 했고 대부분의 은행이 추가로 충당금을 쌓았다.
당시 규정 개정에 앞서 시일이 촉박한 상태에서 잠정집계 된 상황이라 유동적인 측면을 감안하더라도 꽤 큰 규모다.
은행별로는 하나은행이 55조원으로 가장 많았고, 우리은행이 37조원, 신한(통합 전)은행이 31조원, 국민은행이 21조8000억원, 조흥은행이 22조원 순으로 많았다.<표1 참조>
기업 입장에선 한도약정을 통해 현금 유동성을 확보할 뿐 아니라 채권발행이나 신용평가등급에서도 긍정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많이 보유하기를 원한다.
은행 역시 최근까지도 마케팅 차원에서 기업들에 불필요한 한도를 제공해왔고 결국 미사용한도를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은행 담당자들은 입을 모았다.
그러나 은행은 약정한도에 대해선 기업이 요구할 경우 언제나 인출해 줘야 하기 때문에 대상 업체가 그 대출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그만큼의 기회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업체의 신용상태가 안 좋아지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어 은행 입장에선 항상 리스크를 떠안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미사용한도에 대해서도 수수료를 부과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고 일부 은행들이 이를 제도화했으나 현실적으로 은행들의 고객유치 경쟁이 심한 상황에서 유명무실한 상황이다.<표2 참조>
대형A은행 한 담당자는 “제도는 있지만 대기업과 신용등급이 양호한 기업엔 수수료를 면제해 주고 안 좋은 곳도 본부의 승인을 받아 면제해주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놨다.
최근 몇 년간 은행간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한도를 줄이거나 수수료를 부과하면 해당 기업들은 은행을 바꾸려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공통된 반응이다.
◇ 앞으로 미사용한도도 리스크에 반영=그러나 올해 말부터는 새 충당금제도가 완전히 도입되면서 더욱 엄격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지난해 금감원은 예상손실률에 따라 충당금이 산출되는 은행은 산출치에 따라 적립하고 그렇지 않은 은행의 경우 미사용한도 1년 초과분에 대해선 50%의 위험가중치를, 1년 이하는 0%로 해 충당금을 적립할 것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기존엔 한도대출의 미사용한도분은 감안하지 않고 잔액개념으로 위험가중치를 산출했지만 바젤Ⅱ에서는 표준방법의 경우 잔액에 미사용한도의 20%를 감안해 산출하도록 돼 있다.
A은행 한 관계자는 “이제 은행들로서는 불필요한 한도를 많이 갖고 있는 것이 불리해진다”며 “고객에 수수료 형태로 비용을 청구하든지 아니면 꼭 필요한 한도만 가져갈 수 있도록 한도대출을 타이트하게 운영하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 내년부터 한도 관리 본격화될 듯= 당장 올해 말부터 새로운 충당금제도 뿐 아니라 사전운영을 위해 바젤Ⅱ 기준으로 위험가중치 등을 병행 산출해야 하기 때문에 한도대출에 대한 조정이나 수수료 현실화 작업이 빠르면 내년부터 본격화될 수 있다고 일각에서는 내다봤다.
기업 입장에서도 한도가 줄어들 경우 재무구조 및 신용등급 등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어 현금유동성 확보에 대한 대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도 충고한다.
국내 한 업종을 대표하는 대기업D사 자금 담당자는 “한도에 대해 은행들이 강제로 수수료를 부과할 수밖에 없는 시장으로 갈 수 있다고 들었다”며 “아무래도 수수료가 발생하면 비용이기 때문에 한도를 줄이거나 다양한 조달 소스를 마련해야 할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감독당국 한 관계자는 “기업은 바젤Ⅱ 도입 이후에 대출코스트를 줄이기 위해서 안쓰는 한도는 없애고 정해진 한도 내에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금융계 일각에서는 향후 이런 과정을 거쳐 한도 관련 수수료가 현실화되고 기존의 은행이 지급의무를 갖고 있는 한도 이외에 한도를 주지만 지급의무가 반드시 존재하지 않으면서 수수료도 부과되지 않는 한도 등도 새롭게 도입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표1>2005년 은행별 미사용약정 금액
(단위, 조원)
(자료 : 금융감독원)
원정희 기자 hggad@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