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고위 공직자로 있는 사람의 선산이 시골에 있단다.
그런데 진입로가 좁고 포장이 안돼 있어 비가 오면 질퍽거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지역 군수가 ‘높은 분’의 입장을 생각하여 진입로에 자갈을 깔아 약간 정비를 해주려 하였다.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된다. 선산을 지키고 있는 형님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말하자면 “왜 공직자인 내 동생을 곤혹스럽게 하느냐?”는 거다. 이건 우리를 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큰 낭패를 보게 한다는 거였다. 그러니 있던 대로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니까 사실일 것이다. 멋지다. 그 분이 존경스럽다. 술이 확 깰 만큼 신선하고 청량했다. ‘아직도 참 훌륭한 분들이 많구나’ 하는 희망을 느꼈다.
균형감각이 중요하다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균형감’ 아닌가 싶다.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란 원래 갈대와 같이 흔들거리게 되어 있어 자칫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자기의 입장, 자기만의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쥐를 연구하는 사람은 인류가 쥐 때문에 멸망한다는 결론을 내놓고, 환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환경 때문에 지구가 망한다고 한다는데, 그것도 결국은 균형감 상실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처세나 처신도 그렇다. 어쩌다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이름이 나게 되면 처음에는 겸손하고 자세를 낮춰 균형을 유지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균형을 잃고 이상한 처신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몰락하는 것이다.
개인의 처신만 그런 게 아니다. 정치를 해도 그렇고 노동운동을 해도 마찬가지다. 정치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는 순수하다. 균형이 잡혀있다. 모든 것을 국민의 뜻에 따라 판단하고 실행하리라 결심한다.
그런데 조금 세월이 지나고 나면 국민의 뜻과는 관계없이 집단의 이익에 따라 편향된 행동을 한다. 균형을 잃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경우에도 그렇다. 치열한 투쟁에 길들여지다 보면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는 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그럼으로써 사사건건 물고늘어지게 되며, 회사가 망하는 길을 걷고 있는데도 지나친 주장을 계속하는 ‘귀족노동’운동에 빠져 버리는 수가 적지 않다.
균형감을 상실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감이 지나치거나 욕심이 많아서이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오만이 되고 욕심이 많으면 과욕이 되어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을 제일의 덕으로 강조했다.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만도 못하다. 모자람은 채우면 되지만 지나침은 한번 넘친 물을 되담을 수 없듯이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르익는다는 것은?
균형감을 유지하려면 안분지족의 태도를 갖는 게 중요하다. 오만과 과욕을 버리고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의 델포이(Delphoi)성역은 해발 2,457m의 파르나소스 산기슭에 자리한 신화의 땅이다. 제우스의 지시를 받고 대홍수를 피하기 위해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방주를 댔다는 신화가 살아있는 곳이 바로 델포이다. 그 때 살아남은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현생 인류의 시조가 되고, 따라서 델포이는 지금의 인류가 처음 발을 붙인 곳이다.
그 델포이 신전 입구에는 모두들 잘 아는 유명한 경구가 써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와 ‘모든 일에 지나치지 말라’가 바로 그것이다. 인류의 시조가 최초로 거주한 땅에 이런 글이 있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경구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 인간들은 신이 아니기에 오만과 탐욕을 경계하라는 것이요 안분지족하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 가을이다. 이 가을에 사람이 무르익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안분지족하며 만사에 균형감을 갖는 것은 아닐까?
관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