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외화유동성은 외환시장 개입을 위한 재원이 아니라 고객 외화예금 인출, 외화대출 만기, 해외 차입 상환, 파생상품 담보 대응 등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판 성격이 강하다. 외화 고유동성자산과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이 높다는 것은 은행이 위기 상황에서 버틸 체력이 있다는 의미이지, 환율 방어를 위해 마음대로 달러를 내다 팔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당국은 은행권에 단기 외화차입 의존도를 낮추고 외화유동성 방어력을 높이라고 요구해왔다. 위기 때 은행권이 달러 부족의 진원지가 되지 않도록 ‘쌓으라’고 했던 외화유동성을 고환율 국면에서 다시 환율 안정용 재원처럼 바라보는 것은 정책 메시지상 모순으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은행권 긴급소집…“투기적 외환거래 막아달라”
금융감독원은 지난 9일 주요 시중은행과 외은지점의 외화·자금 담당 임원을 대상으로 ‘외환시장 안정화 관련 간담회’를 개최했다. 참석 대상에는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SC은행 등 주요 은행과 스테이트스트리트은행, HSBC 등 외은지점이 포함됐다.금감원은 이번 간담회에서 은행권에 외환시장 거래규범 준수와 시장교란 행위 방지를 위한 내부통제 강화를 당부했다. 환율 변동성이 큰 상황에서 은행의 달러예금 관련 과도한 이벤트와 유치 경쟁을 자제하고, 환차손 위험 등에 대한 소비자 안내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외환거래와 관련해서는 과도한 환율 상승을 유발할 수 있는 투기적 외환거래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촉구했다. 역외 NDF 파생상품 거래 등이 국내 외환시장의 변동성 확대나 일방향 쏠림 현상을 유발하지 않도록 협조해달라는 당부도 이어졌다.
또 주요 은행에 대해서는 외국환포지션 점검 주기를 기존 월간 단위에서 주간 또는 일간 단위로 단축해 한시적으로 관리를 강화하기로 했다. 고도화 외화유동성 스트레스테스트 감독조치 유예도 기존 6월에서 연말까지 6개월 연장하면서, 은행별 자체 외화유동성 관리 강화를 주문했다.
당국이 은행권을 잇따라 불러모은 것은 은행들이 보유한 달러를 당장 시장에 내놓으라는 취지라기보다, 외환시장 쏠림을 키울 수 있는 거래와 영업행위를 사전에 억제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은행은 외환시장의 주요 중개자이자 기업·개인·기관투자자의 달러 수요가 모이는 창구다. 이 때문에 은행권의 외화 조달과 운용이 불안해질 경우 환율 변동성이 더 커질 수 있다.
다만 이 같은 관리 강화가 환율 자체를 끌어내리는 직접 수단으로 해석되기는 어렵다. 원·달러환율은 미국 금리 경로, 달러인덱스, 외국인 증권자금 흐름, 경상수지, 지정학 리스크, 내국인의 해외투자 수요, 역외 NDF 거래 등 복합 요인에 의해 움직인다. 은행권 외화유동성은 이 가운데 시장 불안을 증폭시키지 않도록 하는 보조적 안전장치에 가깝다는 의미다.
과거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은행권 외화유동성 악화는 단순한 ‘보유 달러 부족’보다 ‘단기 외화차입 차환 실패’의 형태로 나타났다.
1997년 국내 시중은행의 차환율은 12월 32.2%까지 급락했고, 2008년에도 국내은행 단기 외화차입 차환율은 4분기 50.1%까지 떨어졌다. 해외에서 빌린 단기 외화자금을 제때 다시 조달하지 못하면서 은행권 외화유동성 불안이 금융시장 전반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후 감독당국은 외화유동성비율과 만기갭비율 규제를 강화했고, 현재는 외화 LCR과 외화 고유동성자산, 순현금유출액 등을 통해 은행권의 외화유동성 방어력을 보다 정교하게 관리하고 있다. 은행들이 위기 상황에서도 외화 지급 능력을 유지하고, 단기 조달시장 경색 시 달러 수요의 진원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취지다.
코로나19 이후 LCR 관리 강화…하나銀 ‘최고’
실제로 최근 주요 은행들의 외화유동성 지표를 보면 코로나19 이후 은행권이 외화 고유동성자산을 대체로 크게 늘린 흐름이 확인됐다.
국민은행의 월평균 외화 고유동성자산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인 2019년 3월 23억600만달러에서 2026년 3월 53억8700만달러로 늘었다. 같은 기간 신한은행은 35억9900만달러에서 92억4600만달러로, 우리은행은 34억5400만달러에서 91억6600만달러로 확대됐다. 하나은행은 2019년 63억800만달러에서 2026년 105억8000만달러로 증가해 주요 은행 중 가장 큰 규모를 유지했다.
외화 고유동성자산은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현금화할 수 있는 외화자산이다. 흔히 ‘은행이 들고 있는 달러 실탄’처럼 해석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고객의 외화예금 인출, 외화대출 만기, 파생상품 담보 대응, 해외 차입 상환 등에 대비해 보유하는 안전자산 성격이 강하다.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 즉 외화 LCR도 대체로 개선됐다. 외화 LCR은 30일간의 외화 유동성 스트레스 상황에서 은행이 버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지표다. 규제비율은 80% 이상이다.
2026년 3월 기준 외화 LCR은 하나은행이 203.85%로 가장 높았고, 우리은행 187.38%, 농협은행 167.71%, 국민은행 157.03%, 신한은행 154.06%, SC제일은행 119.74% 순으로 나타났다. 분석 대상 은행 모두 규제비율인 90%선을 크게 웃돌았다.
특히 2021년 팬데믹 충격 구간에서 일부 은행의 외화 LCR이 눈에 띄게 낮아졌던 것과 비교하면, 팬데믹 이후인 2023년 이후 외화유동성 방어력을 보강한 흐름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국민은행의 외화 LCR은 2019년 110.72%에서 2021년 92.76%로 낮아졌지만, 2023년 124.52%, 2025년 146.73%, 2026년 157.03%로 상승했다. 하나은행도 2021년 106.04%에서 2025년 204.86%, 2026년 203.85%로 높아졌다. 다른 은행들 역시 팬데믹 전후로 LCR을 대폭 강화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이는 팬데믹과 글로벌 달러 조달시장 불안을 거치며 은행권의 외화유동성 관리가 보다 보수적으로 바뀐 결과로 풀이된다. 외화 고유동성자산을 늘리고, 단기 외화 순유출에 대비하는 방식으로 외화유동성 완충력을 키운 것이다.
은행별 외환체력 차이 뚜렷…하나·우리 강세
은행별로 보면 외화유동성 체력에는 차이가 나타났다.외환 강자로 통하는 하나은행은 외화 고유동성자산 규모와 외화 LCR 모두에서 높은 수준을 보였다. 2026년 3월 하나은행의 외화 고유동성자산은 105억8000만달러, 외화 순현금유출액은 51억9000만달러로, 외화 LCR은 203.85%를 기록했다.
우리은행도 외화유동성 지표가 빠르게 개선됐다. 우리은행의 외화 고유동성자산은 2019년 34억5400만달러에서 2026년 91억6600만달러로 늘었고, 외화 LCR은 같은 기간 109.37%에서 187.38%로 상승했다.
신한은행은 2026년 3월 외화 고유동성자산이 92억4600만달러로 주요 은행 중 큰 축에 속했다. 다만 외화 순현금유출액도 60억100만달러로 함께 커지면서 외화 LCR은 154.06%를 기록했다. 국민은행은 외화 고유동성자산 53억8700만달러, 외화 순현금유출액 33억400만달러, 외화 LCR 157.03%로 집계됐다.
외화만기 불일치갭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이 비율은 단기 외화자산과 단기 외화부채의 만기 차이를 보여주는 외화유동성 지표다. 수치가 높을수록 단기 외화상환 여력이 크다는 의미지만, 마이너스 폭이 확대될 경우 단기 외화부채를 차환이나 신규 조달로 메워야 하는 부담이 커진다는 의미다.
2026년 1분기 기준 국민은행은 30일 이내 외화만기 불일치갭 비율이 4.62%였지만 90일 이내는 -0.50%, 1년 이내는 -1.37%였다. SC제일은행도 90일 이내 구간에서 -4.50%를 기록했다. 농협은행 역시 1년 이내 구간은 –1.84%로 나타났다.
올해 주요 은행들의 외화만기 불일치갭 비율은 대체로 플러스 구간이 많아 외화유동성은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단기 유동성 리스크를 가늠할 수 있는 30일·90일 구간에서 대부분 은행이 플러스 값을 보였고, 일부 마이너스 구간도 -1~-2% 안팎에 그쳐 제한적인 수준으로 평가된다.
은행 달러, 환율 방어 ‘주포’ 아닌 금융시장 안전판
전문가들은 은행권 외화유동성 지표 개선의 의미는 환율 방어 능력이 아니라 금융시장 충격 흡수 능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은행들이 외화 고유동성자산을 충분히 확보하고 외화 LCR을 높게 유지하면, 환율 급등기에도 은행권이 달러 부족으로 시장에서 급하게 달러를 사들이는 상황을 줄일 수 있다.그러나 이는 환율을 직접 끌어내리는 효과와는 다르다. 은행권의 달러는 외환시장 개입용 실탄이라기보다 금융시스템 안정용 완충재에 가깝다. 은행이 보유한 외화자산 상당 부분은 외화예금, 외화대출, 해외차입, 외환결제, 파생상품 거래와 맞물려 있어 환율 방어 목적으로 자유롭게 처분하기 어렵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권의 외화유동성 지표는 환율 수준을 직접 결정하는 변수가 아니라 위기 시 은행이 시장 불안을 증폭시키지 않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며 “고환율 국면에서는 외화 LCR뿐 아니라 외화만기 구조, 외국환포지션, 파생상품 거래까지 함께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주요 은행들이 코로나19 이후 외화유동성 방어력을 키워온 만큼, 앞으로의 관건은 보유 달러 규모가 아니라 고환율 국면에서 외화 조달·운용·거래 내부통제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과거 위기 이후 쌓아온 외화유동성을 단기 환율 방어 수단처럼 활용하라는 식의 접근은 은행 유동성 규제의 취지와도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짚었다.
장호성 한국금융신문 기자 hs6776@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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