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시간·공간·장소’다. 권영하 작가가 다루는 장소는 관광 엽서의 좌표 같은 것이 아니다. 작가가 “익숙할만하면 떠나야 했던” 도시들의 파편화된 기억과 삶의 갈망을 회화로 살려낸 '장소'이다.

Doubt1, 37 x 54.8cm acrylic on paper 2025
권 작가는 그의 작업 모티브로 서울 용산 일대, 싱가포르,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 뉴욕 같은 지명을 호출한다. 하지만 그림이 담겨진 화면에서 그는 특정 도시를 재현하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 다뤄진 공간들에는 여러 기억이 섞인 ‘비장소(non-place)’의 성격이 투영된다. 어떤 장소에든 있을 법한 출구와 입구, 내부와 외부의 구획은 흐려진다. 외부로 인식될 듯한 요소가 어긋나게 배치되고 그 왜곡된 구조로 인해 되레 외부가 내부가 되는 순간이 펼쳐진다. 이 지점에 이르면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어딘가”에서 “어떤 상태”로 바뀌게 된다.
권 작가는 자신의 회화를 설명보다 감각을 앞세워 관객에게 던진다. 그래서 그가 그려내는 화면은 차분하고 절제된 구성이 도드라진다. 정체 모를 인물과 모호한 공간이 관람하는 이에게 해석을 하기에 앞서 감각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이유다. 서사를 과잉 공급하기보다는 빛의 방향, 면의 충돌, 프레임의 긴장 등을 통해 서사가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조건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권 작가는 ‘이야기’를 그린다기 보다 이야기가 생기기 직전까지 압력을 높이는 작업에 몰두하는 듯 보인다.

Deep Seated Fear, 37.9 45.5cm acrylic on canvas, 2025
권영하 작가는 오랫동안 서울 용산구 (동부) 이촌동 일대에 거주해 왔다. 그는 자신이 살던 동네를 도심이면서도 “섬처럼 외딴 느낌”이 드는 장소로 묘사한다. 초등학교 학생 시절 서울과 싱가포르에서 다섯 번 학교를 옮긴 경험은 그가 ‘정주’ 보다는 ‘경유’라는 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계기가 됐다. 익숙해질 때 쯤이면 떠나야 하는 삶은 작가에게 공간을 머무는 ‘집’이 아닌 지나치는 ‘통로’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런 통로의 감정은 독일어 ‘젠주흐트(Sehnsucht)’, 즉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갈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권 작가는 늘 떠남으로써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감정 그 자체를 그리고자 한 셈이다.
이번 전시는 권 작가에게는 변곡점이나 다름없다. 그는 지난해에 개인전 《공허 안에(Within the Void)》를 통해서 서사적·상징적 요소에 천착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사나 상징 요소를 많이 덜어내는 대신 회화의 기본인 선과 면, 공간 구조에 집중하고 있다. 붙잡을수록 흐려지는 기억의 찰나를 권 작가는 복도, 창문, 철제 프레임 같은 기하학적 요소의 반복으로 ‘박제’한다.

Faint Sound of Sunlight, 90.9 x 65.1cm acrylic on canvas 2026
권 작가에게 반복은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방법론이다. 반복되는 프레임으로 관객들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탈출구 없는 심리 구조를 드러내고 한층 강화시킨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설고, 친숙한가 하면 이질적인 감각이 공존하는 이중성이다. 공허·상실·압력 구조의 내면을 담아내면서 공간이 심리적 단면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권영하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서 동시대 회화의 이미지 과잉 환경과 서사 경쟁에 휘말리기 쉬운 지점을 벗어나 ‘구조’를 돋보이도록 의도했다. 작가 자신이 말하고 싶은 감정의 원인을 직접 내놓는 대신 감정이 갇히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가 장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호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이 그의 그림에서는 미학적 장치에 그치지 않고 삶의 조건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In the End, 65.1x50cm, acrylic on canvas, 2021
장종회 한국금융신문 기자 jh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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