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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버블과 일본은행의 책임: 책임 전가 게임의 희생양?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smkim54@

기사입력 : 2025-10-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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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버블과 일본은행의 책임: 책임 전가 게임의 희생양?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
2012년에 별세한 미에노 야스시 전 일본은행 총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뵌 것은 1994년 11월 초 한국은행과 일본은행 간 과장급 정례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은행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의 집무실을 예방했을 때 미에노 총재는 우리 일행에게 자신의 의자에 번갈아 앉아 보라고 권할 정도로 친절하고 배려 깊은 인품을 보여 주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은행 내 대표적인 친한파 인사로 알려진 그는 한 달 뒤 퇴임을 앞두고 재임 기간을 마무리하며 양국 중앙은행 간 우애의 상징적 유산을 남기고자 통화스왑 체결을 제안했으나 아쉽게도 여러 우여곡절 끝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미에노 야스시 총재는 일본은행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이끈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1989년 5월 공식적으로 정책금리를 인상하기 이전부터 이미 내부적으로 금리 인상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수석 부총재였던 미에노는 일본 경제의 과열 조짐을 지적하며 통화정책 기조의 전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하였다.

그는 1987년 8월 시장금리 상승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기준금리인 공정할인율 인상을 추진했으나, 같은 해 10월 발생한 블랙먼데이로 일본 주가가 급락하고 엔화가 급격히 절상되면서 금리 인상은 실행되지 못했다.

일본은행 부총재를 지낸 와세다대학교의 와카타베 마사즈미에 따르면 1989년 12월 총재로 취임한 미에노 야스시는 언론과 국민들로부터 자산 버블을 억제하라는 강한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취임 직후 통화 긴축 정책을 단행하여 1989년 12월부터 1990년 8월까지 공정할인율을 2.5%에서 6.0%로 인상함으로써 자산 가격의 급등세를 억제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 경제학자 스콧 섬너(Scott Sumner) 등은 미에노 총재의 급격한 금리 인상이 자산 버블 붕괴를 직접적으로 촉발했으며 그 결과 경기 회복이 지연되어 일본 경제 전반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초래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버블의 재발을 막겠다는 그의 강경한 신념이 자산 가격 조정 과정에서 충격을 오히려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벤 버냉키(Ben Bernanke) 전 미 연준 의장은 프린스턴 대학 재직 시 일본의 자산 버블과 관련하여 다수의 경제학자들이 일본은행의 주요 정책 오류로 지적해 온 세 가지 사례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그는 (1) 1987~1989년에는 통화정책의 긴축 전환이 지연되어 자산 버블의 확대를 초래했으며, (2) 1989~1991년에는 급격한 금리 인상이 자산 가격의 급락을 유발했고, (3) 1991~1994년에는 자산 가격, 은행 시스템, 실물경제가 급속히 붕괴하는 상황에서 일본은행이 충분히 완화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한편 간사이대학의 지누시 도시키를 비롯한 세 명의 일본 경제학자들은 계량분석을 통해 일본은행의 통화정책 기조가 부적절했던 시기를 식별했다. 분석 결과 1987~1988년에는 통화 긴축 전환이 지연된 반면 1992년 이후에는 통화 완화 전환이 늦어졌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9년까지의 일본은행 통화정책 기조의 적정성을 검토한 결과 1987~1988년에는 통화 긴축이 지연되었고 1990~1991년에는 긴축 강도가 불충분했던 것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1992년부터 1995년 초까지와 1997년부터 1998년 초까지는 통화 완화가 지연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자산 버블과 관련하여 일본은행이 1980년대 후반 과도한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버블 형성에 기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1989~1991년의 통화정책을 둘러싸고는 견해가 엇갈린다. 대부분의 해외 경제학자들은 일본은행이 지나치게 급격하게 긴축정책으로 전환한 결과 버블 붕괴에 따른 조정이 완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급격한 위기를 초래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지누시 도시키 등 일부 일본 경제학자들은 당시 통화 긴축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본다. 다만 자산 버블 붕괴 이후 경기 하강이 본격화된 1992년 이후 일본은행이 추가적인 통화 완화 조치를 지연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따라서 일본은행의 버블 대응과 관련하여 제기된 세 가지 정책 오류가 타당한지 그리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정책 오류는 1987~1988년 통화 긴축으로의 전환이 지연되면서 과잉 유동성이 버블의 형성과 팽창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책 지연의 배경에는 세 가지 요인이 지적된다. 첫째 플라자 합의 이후 국제적 정책 공조의 일환으로 일본은행이 저금리 기조를 유지한 점, 둘째 1987년 10월 블랙먼데이 이후 주가 급락으로 인해 통화 긴축 전환이 제약된 점, 셋째 1989년 4월 소비세 도입의 원활한 정착을 위해 정부가 통화 긴축에 반대한 점이다.

일본은행의 1985년 3월 및 6월 조사통계월보에 따르면 당시 일본 경제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1980년대 전반까지는 M2+CD 증가율도 7~8% 범위 내에서 적절히 통제되고 있었다. 스미타 사토시 당시 일본은행 총재는 1985년 7월 전국은행협회 컨퍼런스에서 통화·재정정책의 추가 완화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추가 완화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그러나 두 달 뒤인 9월 22일 체결된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자 일본의 대규모 무역흑자를 완화하고 국제적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국내 총수요를 부양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정책 기조는 불가피하게 완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는 1985년 8월 달러당 240엔 수준에서 1986년 중반 약 150엔으로 급등하며 빠르게 강세를 보였다. 이러한 급격한 엔화 강세는 국내 생산과 투자를 위축시켜 경기 침체를 초래하였으며 이를 흔히 ‘엔고(円高) 경기침체’라고 부른다. 산업생산 감소세가 심화되면서 1986년 실질 GDP 성장률은 전년의 5%에서 3%로 하락하였다.

이러한 경제 여건 속에서 일본은행은 1986년 1월부터 1987년 2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인 공정할인율을 인하하여 5%에서 당시 최저 수준인 2.5%까지 낮추었다. 지누시 도시키 등은 첫 번째와 두 번째 금리 인하가 환율 안정을 도모하고 국내 수요를 부양함으로써 무역 불균형을 시정하려는 일본은행의 자율적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 금리 인하는 국제 정책 공조와 관련된 정치적 압력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세 번째 금리 인하(1986년 4월 19일)와 관련하여 그해 3월 미 연준이 두 번째 금리 인하 직후 일본 측에 추가 금리 인하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1986년 4월 2일자 『일본경제신문』에 보도되었다. 이어 4월 8일 일본 정부는 내수 부양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정책 패키지를 마련했으며 이 안에는 통화정책 기조의 추가 완화 방침이 포함되었다. 다음날인 4월 9일 제임스 베이커 미 재무장관과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대장상이 참석한 미·일 재무장관 회담에서는 일본 정부가 내수 확대를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할 것임을 약속하며 일본은행의 금리 인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압력이 가해지던 시기에 일본은행은 은행들에 대출을 축소하도록 권고하는 한편 스미타 마사루 총재는 통화량 증가에 따른 투기적 토지 거래와 주가 상승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이러한 정황은 세 번째 금리 인하 결정 과정에 정치적 압력이 상당히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네 번째 금리 인하에서도 정치적 압력이 작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6년 9월 27일 개최된 G7 재무장관 회의에서는 무역 흑자국들이 성장률을 높이기로 합의하였다. 이어 10월 1일 열린 IMF-World Bank 연차총회에서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재무장관은 국내 수요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제임스 베이커 미국 재무장관은 일본과 서독이 금리를 인하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은행은 내부적으로 다른 정책 기조를 유지하였다.

10월 5일 스미타 마사루 총재는 추가적인 통화정책 완화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또한 1986년 11월 발간된 일본은행 조사통계월보에는 “일본은행은 통화공급 등 경제 상황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으며 은행들이 대출에 신중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기를 바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은 10월 31일 네 번째 금리를 인하하였다.

1987년 2월 23일 시행된 다섯 번째 금리 인하 역시 정치적 압력에 따라 일본은행의 자체 판단과는 달리 이루어졌다. 일본은행은 금융 및 경제 상황이 위험하다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피력했다. 1987년 1월 발간된 조사통계월보에는 “실물경제 활동에 비해 통화공급 증가율이 훨씬 높고 공정할인율도 당시까지 가장 낮은 수준에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은 2월 23일 공정할인율을 3.0%에서 2.5%로 인하하였다. 이는 1987년 1월 21일 베이커-미야자와 회담과 2월 20일 루브르 합의 등 정치적 압력의 영향으로 시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87년 상반기 동안 일본은행은 지속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통화정책의 과도한 완화 기조를 유지하였다. 이후 1987년 하반기에는 10월 미국 주식시장에서 블랙먼데이가 발생하며 전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일본 경제는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의 선제적 통화 긴축은 지연되었다. 서독 연방은행은 강력한 경기 확장세, 급속한 통화 증가, 마르크화 절하 등과 같은 요인에 대응하여 1988년 6월과 8월에 금리를 인상하였다. 일본의 경제 상황도 서독과 유사했지만 일본은행은 금리 인상을 단행하지 못했다.

지누시 도시키 등은 1988년 1월 미·일 정상회담과 1988년 9월 G7 회담 등에서 통화정책 완화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은행은 과거와 달리 자산 가격과 부채-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보다는 일반 물가를 더욱 중요하게 고려했다고 지적하였다. 1988년 1월 조사통계월보에는 “과도한 통화팽창이 금융 및 자본시장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라고 기술되어 일본은행이 금융 상황에 대한 우려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호 조사통계월보에서는 “물가 안정에 무게를 둔 통화정책은 장기간 지속될 수 있으며, 일본은행은 물가와 환율의 움직임을 면밀히 모니터링하여 적절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것이다”라고 서술되어 통화 팽창의 부작용에 대한 경고는 사실상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통화 공급은 실물경제 활동에 비해 과도하게 확대되었으며 이러한 과잉 유동성은 자산 버블의 팽창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과적으로 1988년 일본은행의 정책적 오류는 자산 가격의 동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일반 물가 중심으로 통화정책을 운영한 데 있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1988년 상반기 이후 다케시타 노부루 내각이 1989년 4월 소비세 도입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도입 과정에서 주요 경제정책의 전환이 정치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공개적·비공개적으로 강조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행이 금리 인상으로 선회한 시점은 자산 가격 버블을 통제하기 어려운 단계로 진입한 1989년 5월이었다. 1989년 5월 31일 공정할인율을 2.5%에서 3.25%로 인상한 후 10월 11일과 12월 25일에는 각각 0.5%포인트씩 추가 인상하였다. 1990년에는 3월 20일에 1%포인트 8월 30일에 0.75%포인트를 올려 플라자 합의 이전보다 높은 6% 수준까지 금리를 인상하였다. 1990년 5월 조사통계월보에는 “일본은행의 정책 기조는 물가 안정을 달성하기 위해 예상 인플레이션의 상승을 조기에 차단하는 데 있다”라고 서술되어 당시의 통화 긴축 조치는 주로 일반 물가를 안정시키는 목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통화정책의 긴축 기조로의 전환은 자산 버블을 억제하는 데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대신 재무성의 행정조치가 버블 억제 및 버블 붕괴 과정에서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재무성은 1989년 12월 26일 증권국장 명의로 주식시장의 과열을 억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업무지시를 내렸다. 증권회사의 보유 주식 평가 이익을 자기자본에 산정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증권회사의 자기자본 규제를 강화했으며 주식 가격 상승을 기반으로 한 레버리지 투자를 억제하는 조치가 포함되었다. 이어 1990년 3월 27일 은행국장 명의로 부동산 관련 대출에 대한 총량 규제, 기업의 비업무용 토지 구입 자금 대출 제한 등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기 위한 업무지시 형태의 규제가 도입되었다.

다음 달인 4월에는 일본 정부가 지가 급등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종합적인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였다. 이 대책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금융기관에 대한 부동산 관련 대출 총액을 제한하고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대출을 억제하는 등 대출 규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토지 보유세 및 취득세의 과표를 현실화하고 일정 기준 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개인 및 법인에 대해 지가세를 신설하며 취득세율을 인상하였다. 이밖에도 토지 거래 신고를 강화하고 지자체의 허가 대상 범위를 확대하였다.

도쿄 대학의 요시미 슌야와 지누시 등 세 명은 재무성의 업무지시와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의도는 좋았지만 타이밍이 너무 늦어 버블 붕괴를 가속화시켰다는 의견을 피력해 일본은행의 급격한 통화 긴축 만이 버블을 붕괴시킨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시카고 대학의 아닐 카시야프도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이 자산 버블의 붕괴를 촉발했다는 통상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주장했다.

버블과 관련해 일본은행의 정책 오류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1991~1994년 자산 가격, 은행 시스템, 실물경제가 동시에 급락하는 상황에서도 통화정책을 충분히 완화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은행은 1991년 7월 1일, 9월 13일, 11월 5일에 세 차례에 걸쳐 금리를 각각 0.5%포인트 인하하여 공정할인율을 6%에서 4.5%로 낮추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행의 경제 상황 인식은 낙관적이어서 버블 붕괴에 따른 부채-디플레이션 초기 단계 진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1991년 7월 조사통계월보에서는 “일부 경제활동이 아직까지 왕성하기 때문에 물가 동향을 면밀히 모니터링하는 것에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기술하였다. 이어 1991년 12월 조사통계월보에서는 “이번 정책조치는 물가 안정을 기반으로 성장이 계속될 수 있도록 돕기 바라며 앞으로도 물가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신중한 정책 운용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서술하였다. 1992년 2월 28일에는 공정할인율을 0.75%포인트 인하하여 3.75%로 낮추었으나 당시 일본은행은 부채-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인플레이션 방지 정책을 지속하였다.

지누시 도시키 등은 일본은행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을 1992년 6월 조사통계월보에서 “버블의 붕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후로 보고 있다. 실제로 1992년 7월부터 1995년 9월까지 일본은행은 다섯 차례 금리를 추가 인하하여 공정할인율을 3.75%에서 당시 최저 수준인 0.5%까지 낮추었다. 지누시 등은 1990년대 초반 일본은행이 “디플레이션 갭”이나 “부채-디플레이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던 점을 들어 당시 일본은행은 부채-디플레이션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해 적극적인 추가 완화를 지연했다고 평가하였다.

한편 2002년 6월 미 연준 보고서는 당시 일본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낙관론을 고려할 때 1991~1995년 동안의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불합리하거나 부적절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평가하였다. 다만 보고서는 일본의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완화 강도가 부족할 경우 디플레이션 위험이 확대되어 통화정책의 경기 부양 효과가 약화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본이 디플레이션 위험을 더 중시하여 보다 과감한 완화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평가하였다.

결론적으로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일본은행의 버블 관련 세 가지 정책 오류를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먼저 플라자 합의 이후의 과도한 통화 완화 기조는 일본은행의 자체 과실이라기보다는 국제 정책 공조에 따른 정치적 압력의 결과였다는 점이 분명하다. 둘째 1989년 5월 이후 미에노 총재의 급격한 통화 긴축이 버블 붕괴를 촉발했다는 주장은 당시 재무성이 버블 억제를 위해 내린 업무지시가 함께 작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일본은행이 버블 붕괴 이후 통화정책을 신속하게 대폭 완화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정책 오류로 평가된다. 이는 당시 일본은행뿐만 아니라 다른 정책 당국도 버블 붕괴에 따른 부실 대출 축적이 거시경제에 미칠 심각한 영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위기에는 언제나 그 책임을 둘러싼 ‘책임 전가 게임(blame game)’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타임(Time)』지는 2008년 12월 31일자 기사에서 저스틴 폭스(Justin Fox)가 「금융위기 책임 전가 게임(The Financial Crisis Blame Game)」이라는 글을 통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책임 요인을 열두 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장기간의 경제 호황, 앨런 그린스펀, 왜곡된 금융 규제, 월스트리트, 주택 소유에 대한 집착, 과잉 유동성, 합리적 시장에 대한 맹신, 우리 모두, 부시 행정부, 2000년 상품선물현대화법, 신용평가사, 리먼브라더스의 파산 방치 등을 그 요인으로 꼽았다.

이러한 책임 요인들은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인과관계가 불분명하거나 지나치게 단순화·희화화된 측면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당시 일본은행과 미에노 야스시 총재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지목되면서 ‘책임 전가 게임’의 희생양이 되었던 측면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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