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현재 은행·증권·보험을 포함한 총 신탁계 수탁고 규모는 679조9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중 은행 신탁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절반 수준(48.8%)인 331조9000억원으로 나타났다.
은행들은 다양한 유형의 신탁 신상품을 내놓으면서 고객 유치에 나섰고 이에 따라 은행 내 신탁 자산도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은행들이 신탁에 집중하는 까닭은 저금리 상태가 이어지면서 예대마진을 통한 수익 창출이 예전에 비해 어려워지자 수익원 다양화를 모색하기 때문이다.
◇ 은행 신탁 잔고 및 수수료 수입 증가세
국민·신한·우리·하나 4대 은행의 올해 10월 말 신탁 잔액은 177조원으로 작년 말(146조원)보다 21% 늘었다. 고액 자산가를 위한 PB영역에 강점을 가진 KEB하나은행이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신탁 잔액 면에서 1위였으나 다른 은행들도 신탁업에 집중적으로 힘을 쏟으면서 격차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은행들이 벌어들이는 신탁 수수료도 증가하고 있다. 각 은행 올해 실적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은행의 3분기 누적 신탁수수료 이익은 540억원으로 전년동기(340억원)대비 58.8% 증가하며 가장 큰폭으로 성장했다.
신한은행도 663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5% 늘었다. 분기 기준으로는 3분기 253억원으로 전년동기(200억원)보다 26.5% 증가했다. 국민은행은 1362억원으로 전년동기(2060억원)대비 33.9% 감소했다. 대신 분기별로 따지면 올 2분기 422억원에서 3분기 509억원으로 증가세다. 기업은행도 3분기 신탁수수료이익은 164억원으로 전년동기(147억원)보다 11.6% 늘었다.
◇ 고령화, 저금리가 신탁업 확장 이끌어
은행의 신탁 자산이 늘어나는 이유는 이에 대한 고객들의 관심이 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사회로 변화고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는 사회 현상과도 맥락이 닿아있다. 자산을 가진 고령층이 적극적인 투자 대신 신탁을 선택하거나 퇴직연금 신탁처럼 중도에 깨면 세금 혜택을 주지 않는 신탁 상품이 늘고 있어 상품 가입을 그대로 유지하는 고객이 많다.
저금리 기조에서 예적금으로 1%대 이자를 받게되는 경우도 늘어 이에 만족하지 못한 고객들이 주가연계증권(ELS)에 가입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은행은 ELS를 신탁 상품에 넣어 판매한다. 과거 일본도 고령화와 초저금리가 맞물린 1990년대 중반 이후 신탁 수요가 빠르게 늘었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상품도 다양해지고 있다. 기존에는 개인연금신탁, 금전신탁 등 투자상품 위주였지만 최근에 출시되는 신탁 상품들은 목적에 따라 세분화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언(遺言) 신탁이 있다. 신탁 상품에 가입하면 재산 자체는 맡긴 사람의 것이지만, 법률적으로는 은행 등 금융회사가 권리 행사를 한다. 추후 상황에 따라 은행 등을 통해 정해둔 대로 재산이 관리·처분될 수 있다.
하나은행은 2010년 4월부터 ‘유언 대용 신탁’을 판매하고 있다. 생전에는 신탁자의 의사대로 돈이 운용되고, 사후에는 지정한 몫대로 상속하거나 혹은 기부도 할 수 있는 구조다. 현재 가입자 83명이 총 2700억원을 신탁했다. 유언 신탁이 성과를 거두자 상품 다양화 측면에서 KEB하나은행은 부모를 잃고 미성년 자녀들만 남는 경우를 대비한 ‘재산 지킴 신탁’과 치매 등 정신적 질환을 대비한 신탁 상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신한은행(내리사랑신탁)과 우리은행(명문가문증여신탁), 국민은행(골든라이프스마트증여신탁)까지 다른 은행들도 비슷한 내용의 상품들이다.
이색적이거나 수익성을 추구한 상품들도 나오고 있는데 국민은행이 가장 적극적이다. 국민은행은 최근 반려동물을 위한 ‘펫(pet·반려동물) 신탁’ 상품을 출시했다. 가입자가 은행에 돈을 맡기면서 본인이 죽은 뒤 반려동물을 돌봐줄 새로운 부양자를 미리 지정하면, 은행이 신탁 가입자가 죽은 뒤 반려동물 부양자에게 돈을 지급하는 상품이다. 1000만원까지 적립할 수 있다. 한 달 동안 가입 건수는 10건이지만, 문의가 많아 원래는 가입대상동물을 강아지에서 고양이로 확대했다.
또 국민은행은 은행에서 상장지수채권(ETN)을 투자할 수 있는 ‘ETN 신탁’ 상품도 출시했다. 이 상품은 △해외주식, 채권, 원자재 등 직접 투자하기 어려운 자산도 신탁을 통해 ETN에 투자가 가능하며 △중도해지수수료 부담없이 언제든지 중도해지가 가능하고 △환매시에는 4일 후 자금이 결제돼 최대 8~9일이 소요되는 해외펀드에 비해 환금성이 높다.
◇ 규제완화 요구에 타 업종 반발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14일 금융감독원, 금융연구원, 자본시장연구원, 은행·증권·보험 업계 관계자 등 20여명 전문가로 구성된 ‘신탁제도 활성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신탁의 영역을 종합 자산관리 역할까지 확장하기 위해 신탁업 규율 체계를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이 신탁 관련 규제 완화를 요청하면서 증권사 등 다른 업종 금융사들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은행업계에서는 신탁 시장 활성화를 위해 비대면 신탁상품 판매와 광고·홍보 규제 완화와 함께 일임형 신탁을 취급할 수 있도록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일임 등의 업무를 할 수 있는 증권사에 비해 자산관리 상품 수단이 다양하지 못한 은행들로서는 일임형 신탁이 도입되면 자산관리 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증권사들은 은행권에 일임형 신탁 도입이 되면 투자일임업과 신탁업을 구분해놓은 현 자본시장법 취지와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일임형 신탁은 증권사들이 취급하는 랩어카운트와 비슷한 상품인데 기본적인 판매 창구부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불리하다는 주장이다.
신탁 시장이 커가는 가운데 은행과 다른 업종과의 경쟁은 점차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윤종규닫기

신윤철 기자 raindream@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