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대한 세계 금융시장에 직접 참여하면서 동물적 감각에 가까운 모니터링 역량을 자랑하는 초국적 대형 IB들이 가계부채 위험을 대한민국 경제 대표적 리스크로 꼽고 있다는 사실도 소용 없어 보인다. 고령화 등 구조적 변화가 겹치면서 경기순환 사이클 상 저성장, 저금리로 집약되는 구조적 위험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높은 가계부채 부담은 내수 침체는 물론 금융시스템 위험도 함께 키울 것이라며 때마다 지적했던 전문가들의 상소문엔 아예 무감각해진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8일 A대형은행 고위관계자는 “가계부채 규모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는 있으나 지난 1년 간 금융당국과 감독당국의 스탠스는 크게 우려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의 바탕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991조원일 때보다 1000조원 넘으면 극한의 공포를?
공식 통계에 앞서 가계빚이 지난해 사실상 1000조원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부각시킨 대중매체들이 대책마련의 시급성을 경쟁적으로 타전하고 있는 이슈 붐-업 행태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7일 한국은행이 예금취급기관 가계대출 규모를 발표하면서 1000조 돌파 ‘냄비’는 급가열 되기 시작했다. 지난 9월 말 현재 금융권 가계대출과 카드사용에 따른 빚을 합한 가계신용 잔액이 991조 7000억원이었는데 10월과 11월 두 달 동안 은행과 비은행 금융기관 가계대출이 8조 1000억원 늘었고 기타금융기관 주택담보대출 4000억원을 합하면 1000조원 돌파라는 수치를 계기로 삼은 것이다.
아직 일부이긴 하지만 이런 행태를 놓고 992조와 1000조 사이에 위험이 급상승되는 계기나 성분이 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하게 살펴서 좋은 처방을 내놓는 게 중요하다며 일침을 놓는 소리가 금융계 일선에선 간간히 들리고 있다. 일각에선 그 같은 접근태도로는 근본적 진단과 처방 마련이 지연될 여지가 있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지금까지 보여 준 당국의 인식과 태도에 비춰보면 1000조원을 넘어 섰으니 대책 마련이 시급하지 않느냐는 대중매체의 꾸지람에 당장 내놓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다.
◇ 1000조원 돌파보다 더 본질적인 위험
아울러 기어코 1000조원을 넘어서는 규모 부담이 부각되면 될수록 본질적 어려움은 희석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의 다른 통계를 보면 1000조원 아래 숫자를 놓고서도 더 큰 심각성을 간파할 수 있다. 심각성을 따지자면 예금은행과 비은행금융기관 가계대출 그리고 기타금융기관 자산으로 넘어간 주택담보대출을 합한 가계대출 규모가 순처분가능소득 규모를 지난 2011년 이미 추월했던 사실이 더욱 자극적이다.
빚진 돈이 처분가능소득 수준을 넘어 버렸는데 빚진 규모가 1000조이건 990조이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 수준의 접근법이다. 익명을 청한 한 민간연구기관 전문가는 “가계부채 규모가 잠재적 위험요인이 됐다는 이야기는 중학생들도 다 아는 주제일 뿐이고 새삼 따로 분석하거나 진단할 필요가 없을 만큼 기존 연구와 검토가 다 이뤄져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냐는 점 역시 “정부 차원의 정책적 선택 또는 우리 사회의 결단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B 금융공기업 고위 관계자는 “해법은 사실 첫째 빚 규모를 줄이거나, 둘째 갚을 능력을 키우거나, 아니면 빚도 일정 정도 줄이고 갚을 능력도 키워서 적정수준을 찾는 셋 중 하나를 택하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8일 오후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노출되고 있는 당국 관계자들의 반응이나 지금까지 정책 현안에 등장한 인식을 미뤄봤을 때 정부 처방은 매우 단순할 전망이다. 도리어 금리부담이 큰 2금융권 대출을 억제하고 서민금융상품을 활성화하는 지난 정부 정책은 계승하면서도 범 정부기관이 머리를 맞대고 거시경제정책 수준의 대책 마련도 추진하겠다는 다짐이라도 내놨던 기백을 잇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달 안에 모습을 드러낼 대책 방안이 ‘연착륙’조차 사라진 ‘관리 방안’인 것으로 알려진 것이 사실이라면 금리부담 최소화, 만기 장기화 등 이미 다 진행돼 있는 정책의 재탕일 가능성마저 농후한 실정이다.
정희윤 기자 simmoo@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