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길, 셔터 문은 내려와 있지만 밤10시가 돼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은행 지점과 본점들이다. IMF이후 은행권의 혹독한 구조조정이 은행 직원들을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은행권은 IMF이후 사상 최대 수익을 시현하고 있다. 하지만 그 뒤편에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고된 동료들의 업무를 떠 맡은 은행원들이 있었다. 산더미 같은 서류더미와 함께.
이는 지난해 C은행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C은행은 지난해 평균 키 반납시간과 업무종료시간을 조사한 결과 본점의 경우 평균 키 반납 시간은 21시35분이고 23시 이후에 반납하는 부서도 3개 부서에 달했다. 지점도 행원들의 퇴근시간이 평균 21시11분이었다.
이렇게 폭증하는 업무량 속에서 지난 4월말부터 은행원들의 불측 사망 등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C은행 리스크팀 관리과장의 돌연사가 있었다. 이후 K은행 계약직 여직원의 불의의 사고와 5월초 정규직 여직원의 뇌졸증으로 인한 죽음이 있었다.
또 전남 도청 출장소에 출근하던 某 은행의 한 직원이 금고문을 열다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기도 했다.
4월말부터 지난 한달여간 3개은행에서 10여명의 은행원이 돌연사했다. 은행가에는 시쳇말로 ‘은행원 목숨은 파리 목숨’이라는 ‘뱅커 괴담‘이 나돌고 있다. 예전의 파리 목숨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고’를 의미했다면 이제는 진짜 하나밖에 없는 ‘숨줄’을 의미하는 셈이다.
외형상으로 시중은행들은 정부와 체결한 경영정상화 MOU 초과 달성으로 표정관리를 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 은행원들은 업무 과다와 사기저하 등으로 골병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각 은행들이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안한 것도 아니다. 업무량 증가에 따른 은행원들의 사기진작 차원에서 일부 은행들이 직급을 상향 조정했다.
하지만 그 직급에 맞는 일이 또 있는 법, 이는 또 다른 업무 과다로 이어지고 있다.
일이 늘어나고 경영성과가 눈에 뛸 만큼 늘어나면 그에 따른 반대급부가 있어야 하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들이 직원들에게 예보와 체결한 임금동결등 MOU로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또 향후 서울 제일은행등 일부 은행의 ‘짝짓기’와 지주회사 설립 등으로 조직 통폐합이 예상됨에 따라 인력 구조조정이라는 현실속에서 은행은 직장으로서 점차 매력을 잃고 있다. 시중은행 한 직원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은행권에서 한달에 한두명씩 과로사 얘기가 나왔지만, 지난 4월말부터 은행원들의 업무 로드에 따른 돌연사가 폭증하고 있다”며 “이제는 은행원들 사이에 ‘몸에 이상이 생기면 응급실보다는 은행에 가야지 산재보험 덕이라도 볼 수 있다’는 우스개 소리마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시중은행들이 외국계 컨설팅업체로부터 컨설팅을 받은 후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가 강화되고 있고, 지금은 초기단계 일 뿐”이라며 “성과제가 정착되면 그에 따른 은행원들의 휴유증이 더욱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2면>
한창호 기자 che@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