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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칼럼] 거대 공기업이라는 환상

유상희 전 한국전력거래소 이사장

기사입력 : 2026-07-08 15:48

‘더 효율적인 시장’이 답이다

유상희 전 한국전력거래소 이사장

유상희 전 한국전력거래소 이사장

[유상희 전 한국전력거래소 이사장] 정부가 한국전력의 발전자회사 5개사를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최근 공개된 연구용역 결과에 따르면 대규모 투자 여력 확보, 석탄화력 폐지에 따른 인력 재배치, 중복 기능 해소 등이 통합의 명분으로 제시됐다.

겉보기엔 그럴듯하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로 전력 수요가 폭발하는 상황에서, 흩어진 발전공기업을 하나로 묶어 체급을 키우자는 주장은 매력적으로 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논의는 전력산업의 진짜 문제를 본질과 무관한 ‘조직의 숫자’ 문제로 왜곡되고 있다.

지금 한국 전력산업의 병목은 발전사가 나뉘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무늬만 분할되어 있을 뿐 시장에서 제대로 경쟁하지 않는 구조, 너무나 약한 가격신호, 불투명한 계통접속, 탄소 및 계통 비용의 왜곡에 있다. 한마디로 문제는 ‘시장의 부재’인데, 해법을 ‘공기업의 확대’에서 찾고 있으니 방향부터 틀렸다.

정부 주도의 거대 통합 공기업은 당장의 갈등을 봉합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른다. 5개사의 손실과 석탄발전의 좌초 위험, 인력 재배치 부담을 하나의 거대한 울타리 안에 집어넣으면 표면적으로는 정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숨긴 것에 불과하다.

비효율 자산의 손실은 내부 보조로 가려지고, 퇴출되어야 할 노후 설비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수명이 연장될 것이다. 전기요금에 반영되어야 할 비용은 공기업의 부채로 쌓인다. 다섯 회사일 때는 가능했던 ‘상호 비교와 효율성 검증’마저 베일 속으로 사라진다. 통합 공기업은 구조조정의 도구가 아니라, 구조조정의 은폐 장치가 될 위험이 크다.

투자 여력 확보와 기능 중복 해소라는 명분도 빈약하다. 재생에너지와 에너지저장장치(ESS) 투자의 핵심 병목은 공기업의 자본 부족이 아니라, 민간자본이 들어올 수 없는 경직된 시장 구조다. 장기 PPA(전력구매계약) 시장이 열리고 지역별·시간대별 가격이 작동해야 민간 투자가 움직인다. 발전 5사의 유사 기능은 ‘낭비’가 아니라 원래 도입하려 했던 ‘경쟁’의 전제조건이다. 진짜 문제는 이 겹친 기능들이 전력시장의 제도적 한계 탓에 경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도 실패의 결과물을 조직 분할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급변하는 전력 시스템의 조정 기능 역시 거대 공기업이 맡아서는 안 된다. 석탄, LNG, 재생에너지를 모두 쥔 거대 사업자가 조정자 역할까지 맡으면 필연적으로 이해상충이 발생한다. 조정은 중립적인 계통운영자와 투명한 시장, 그리고 지역 배전망 운영자(DSO)가 시장 규칙에 따라 해야 한다. 가격 없는 조정은 행정 배분이 되고, 경쟁 없는 조정은 관료적 통제로 전락할 뿐이다.

AI와 첨단 산업이 요구하는 것은 공기업이 배정해 주는 전기가 아니라, 기업이 직접 선택할 수 있는 무탄소 전력이다. “언제 계통 접속이 가능한가”, “장기 전력가격을 예측할 수 있는가”라는 기업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공기업 통합이 아니다. 투명한 계통 정보 공개, PPA 시장 활성화, 지역별 가격제 도입 등 제도의 개혁이다.

지금 필요한 개혁의 순서는 명확하다. 전력가격을 정상화하고, 탄소 및 계통 혼잡 비용을 가격에 반영하며, 재생에너지와 ESS가 제값을 받는 유연성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민간 PPA 시장을 넓히고 배전망을 실시간 운영 플랫폼으로 전환해야 한다.

발전공기업 통합은 이 모든 필수 개혁을 가리는 연막이 될 뿐이다. 조직을 합치는 것은 쉽지만, 가격을 바로 세우고 투명한 시장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지금 한국 전력산업에 필요한 것은 조직개편이 아니라 시장개혁이다.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등 국가 미래를 짊어진 첨단 산업의 아킬레스건은 결국 전력이다. 이들 산업의 기반을 흔들지 않으려면 전력산업 개편을 정치적 이벤트나 조직개편 수준으로 소비해선 안 된다. 과거의 거대 공기업으로 돌아갈 것인가, 미래의 전력시장으로 나아갈 것인가. 답은 명확하다. 더 큰 공기업이 아니라, 더 효율적인 시장이다.

유상희 전 한국전력거래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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