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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Essay] 삶까지 형형색색 물들여가는 가을날을 거드렁 거리며 즐겨보세, 전주에서

김민정 기자

minj@fntimes.com

기사입력 : 2019-08-28 18:06

[Travel Essay] 삶까지 형형색색 물들여가는 가을날을 거드렁 거리며 즐겨보세, 전주에서이미지 확대보기
[WM국 김민정 기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비질비질 나는 여름이다 싶었는데, 어느새 높아진 하늘과 기분 좋게 살랑이는 바람은 가을이 오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때쯤이면 마음은 다시 크게 휘청인다.

조금씩 변해가는 거리의 색들이 어서 길을 떠나라 재촉하고 마음은 벌써 저 혼자 기억을 충전하러 내달린다. 후백제의 수도이자 조선왕조의 발상지, 가장 질 좋은 종이를 만들던 한지의 본가, 출판과 기록문화의 도시이자 삶의 여유와 풍요가 소리에 담겨 내려오는 멋과 맛의 도시 전주로.

추억보다 느리게 걷다 보니 내가 길인 듯 길이 나인 듯

전주 하면 한옥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 자칫 식상하다 느껴질 수 있으나 전주 한옥마을의 골목을 걸으며 지난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가까워진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는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에 해설사와 함께 골목길을 걷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옥마을 자체가 그리 넓지는 않아 지도를 참고하며 발길 닿는 데로 산책해도 좋지만 아무래도 전문 해설사가 함께라면 이 마을에 얽힌 좀 더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터다.

누군가와 만나면 한 명은 비켜서야 지날 수 있는 좁고 긴 골목길을 누비는 일은 흥미롭다. 올망졸망 늘어선 크고 작은 공방들을 들여다보고 전통한지원에 들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자랑하는 전주한지의 생산 과정을 엿보거나 몇몇 이름난 한옥의 내부를 슬쩍 들여다보고 알지 못했던 역사의 뒷이야기를 듣노라면 마치 그때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다.

그 중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 선생이 거주하는 승광재에서 한옥생활체험관까지 이어지는 골목이 마음에 든다. 구불구불 끝이 보이지 않는 좁고 긴 골목길 안에 고여 있는 시간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근사하다.

길은 어느새 수령 600년이 훌쩍 넘은 은행나무 우뚝 선 은행로와 연결되고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인 최명희 문학관, 교동아트센터(1930년대 ‘백양메리야쓰’ 공장이 아트센터로 변신한 곳), 부채문학관과 경기전길을 지나 전동성당 앞으로 이어진다.

한옥마을의 메인로드 중 하나인 은행로의 졸졸 물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걷는 일도 여유롭기만 하다. 오래 전 그 자리에 있다 사라진 실개천을 새롭게 복원해 오밀조밀 물길을 만들어냈다. 길 따라 걷다 보면 바람 한줄기의 작은 속삭임도 애틋한 추억 한 자락이 된다.

전주를 여행하다 보면 유난히 한지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한옥마을 내의 부채문화관에 들러 청신(淸晨)한 바람 일으키는 전주의 부채를 만나더라도, 경기전 옆에 위치한 전주목판서화체험관에 들러 용비어천가와 훈민정음 등 한국을 대표하는 목판인쇄본의 복원과정을 관람하고 이산 안중영 선생의 목판 작품을 이용해 목판화를 찍어보고 채색하는 체험을 하는 중에도 공통분모는 바로 전주 한지였다.

전주 한지의 우수성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는 바다. 한지는 ‘백지’라고도 불렸는데 흰 백(白) 자뿐 아니라 일백 백(百) 자를 쓰기도 했단다.

이는 닥나무 가지에서부터 시작해 한 장의 한지가 만들어질 때까지 손이 백 번 간다고 해 붙여진 것이다. 그만큼 사람 손과 정성이 스며있는 우리종이인 한지, 특히 전주 한지는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훌륭한 품질을 자랑한다고 했다.

[Travel Essay] 삶까지 형형색색 물들여가는 가을날을 거드렁 거리며 즐겨보세, 전주에서
골목골목 고인 시간의 맛을 찾아 떠나는 흥미진진 맛기행

사실 전주 여행자들 사이에서 한옥마을이 꽤나 변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은 터였다. 어떤 이는 이제 한옥마을이 온통 카페나 식당으로 뒤덮였다고 한탄을 했고 또 다른 이는 전주에 비빔밥 말고는 무에 먹을 것이 있냐는 볼멘소리도 했다. 하지만 이집 앞에선 그 모든 이야기도 ‘일단 멈춤’이다. 베테랑칼국수집 앞에서 말이다.

개다리소반을 흉내 낸 조그만 2인용 탁자 앞에 자리를 잡고는 이 집의 대표 메뉴인 칼국수와 쫄면, 만두, 콩국수 중 하나를 시키면 이제 남은 건 초조하게 기다리는 일 뿐이다. 칼국수가 똑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담겨진 푸짐한 양 하며 걸쭉한 국물에 계란 풀고 휘휘 저어 만든 뜨겁고 담백한 국물과 그 위에 푸짐하게 얹은 들깨가루와 김 가루, 그리고 빨간 고춧가루까지. 한번 젓가락을 들면 그릇의 바닥이 보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1976년 개업 당시 칼국수 한 그릇에 100원으로 출발한 값이 43년 새 70배인 7,000원으로 올랐다지만, 이 집의 국수 맛이나 인기는 여전한 듯 보인다. 커다란 식당 규모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식사시간이면 늘 길게 줄을 선단다.

한옥마을에는 확실히 카페가 많긴 하다. 전주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은 한옥마을에 카페가 몇 개쯤 될까요, 하는 질문에 대단히 난감해했다. 자고 일어나면 뭐가 생겨나고 또 다음날엔 바뀌어 있는지라 정확한 수는 알기 어렵다고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아침을 향 좋은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하거나 커피 한 잔을 동무삼아 잠시 쉬고 싶을 때가 있긴 하다. 그럴 땐 한옥 마을 곳곳에 숨어있는 예쁜 카페가 반갑다. 직접 콩을 볶고 핸드드립을 하는 전문점도 많아졌고 솜씨 좋은 바리스타가 만들어주는 달달한 라테 한 잔도 좋다. 그 중 최명희 문학관 근처 빈티지한 외관의 ‘더 스토리’가 한옥마을 최초의 카페라고 했다.

이후 커피 트렌드와 맞물려 한옥마을의 카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다만 아쉬운 것은 온통 ‘커피’라는 점이다. 이 마을의 고풍스러움과도 잘 어울리는 한국식 찻집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버텨온 ‘교동다원’의 존재가 반갑다. 여기에 최근 폭풍 같은 인기를 얻고 있는 찻집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남천교 방향 은행로 끝자락의 ‘외할머니 솜씨’다.

이 구수한이름의 찻집은 달달한 단팥죽과 옛날식 팥빙수 그리고 쌍화차 등의 몇 가지 몸에 좋은 차를 판다. 말쑥한 외관의 한옥을 개조해 정갈하고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단내 솔솔 풍기는 옛날식 팥죽을 쑤어준다는 설명만으로도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부드럽고 달콤하며 씹을 것도 없이 쏙 넘어가는 따끈따끈한 단팥죽과 눈꽃처럼 폭신한 얼음을 갈아 넣고 잘 삶은 팥을 듬뿍 얹고는 숭덩숭덩 잘라낸 말랑말랑한 찰떡에 고소한 흑임자가루 까지 뿌려낸 팥빙수를 번갈아가며 먹다 보면 그 맛에 홀딱 빠져 멈출 수가 없다.

물론 한옥 안에 들어앉은 운치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렴하고도 질 좋은 와인을 한 잔 곁들여 신선한 샐러드와 파스타 또는 화덕에 구워낸 피자 등을 먹어도 좋다.

검은 기와지붕을 나란히 하고 이탈리언레스토랑과 한식집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이 마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옥마을에서의 주메뉴는 한식이다.

특히 전주의 한정식은 한식의 정수를 모아놓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라온 등 시내의 이름난 한정식집과 함께 한옥마을 최명희 문학관 후문 앞의 ‘양반가’나 30년 전통의 ‘갑기원’ 그리고 깔끔한 상차림으로 여성들이 좋아하는 ‘전주향’ 등이 유명하다.

※ 본 기사는 한국금융신문에서 발행하는 '재테크 전문 매거진<웰스매니지먼트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김민정 기자 minj@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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