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발행액 71조 6010억 원 중 상환용 회사채 발행 규모는 52조2017억 원으로 집계됐다. 반면 운영자금 목적 발행은 14조6158억 원(20.4%), 투자 목적 발행은 4조1145억 원(5.7%)에 그쳤다. 기업들이 불확실한 경기 전망 속에서 신규 설비 투자나 사업 확장을 위해 지갑을 열기보다는 내실 경영과 재무 구조 안정화에 치중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같은 차환 중심 구조 속에서도 그룹별 자금 운용 전략에는 뚜렷한 온도 차가 드러났다.
본 기사는 한국금융신문이 2025년 한 해 동안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일반 회사채 및 자본성증권(후순위채, 신종자본증권) 발행신고서를 전수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했다. 이번 분석은 실질적인 시장 수요를 파악하기 위해 은행채·여전채·ABS 및 수요예측을 실시하지 않은 발행 건은 제외한 수치를 기준으로 산출했다.
9.7조 쏟아낸 SK, 90%가 차환… 롯데·CJ·한진은 투자 '0'
먼저 개별 기업 기준으로 보면 상환용 발행은 KB증권이 2조 원으로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SK가 1조6300억 원, NH투자증권과 연합자산관리가 각각 1조5000억 원으로 뒤를 이었다. SK이노베이션·고려아연 1조4000억 원, LG유플러스·대한항공·한국항공우주산업이 각각 1조 원을 차환용으로 발행했다.금융권의 상환 수요도 두드러졌다. 신한투자증권(9000억 원), 삼성증권(8000억 원), 한국투자증권(7150억 원) 등 주요 증권사들과 4대 금융지주가 일제히 대규모 차환에 나섰다. 제조업체 중에는 현대제철(8500억 원), 에쓰오일(6600억 원), 포스코(6468억 원), CJ제일제당·HD현대·LG화학(각 6000억 원)이 기존 채무 상환을 목적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그룹별로는 SK그룹이 가장 활발하게 시장을 찾았다. 지난해 총 9조 7190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물량을 쏟아냈지만, 이 중 90.3%인 8조 7800억 원을 상환용으로 채웠다. 지주사인 SK와 SK이노베이션 등 주요 계열사가 대거 차환 발행에 나선 결과다. 한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SK그룹은 반도체·AI 부문의 견조한 실적을 바탕으로 배터리 등 미래 사업의 포트폴리오 재편을 진행 중"이라며 "단순 차환을 넘어 사업구조 리밸런싱 과정에서의 대규모 조달이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반면 롯데그룹과 CJ그룹은 실질적인 재무 방어에 매진했다. 총 1조 9730억 원을 조달한 롯데그룹은 롯데쇼핑(5500억 원), 롯데칠성(4500억 원), 호텔롯데(2000억 원) 등 주력 계열사가 발행액의 95%인 1조 8730억 원을 부채 상환에 쏟아부었다. 유통과 화학 부문의 실적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투자용 발행은 단 한 건도 없었다.
CJ그룹 역시 전체 1조 6500억 원 중 96.4%인 1조 5900억 원을 상환용으로 할애했으며, 투자용 조달은 ‘0원’이었다. 한진그룹(1조 5730억 원), 영풍그룹(1조 4000억 원), HD현대그룹(1조 2400억 원) 역시 전액 상환 목적으로 발행하며 현금 흐름 관리에 주력하는 모습이 뚜렷했다.
이외에도 현대차그룹이 전체 3조1600억 원 중 64.6%인 2조400억 원을, 포스코그룹은 1조7400억 원 중 74.0%인 1조2868억 원을, GS그룹은 1조4600억 원 중 87.7%인 1조2800억 원을 기존 채무 상환에 사용했다.
‘투자’는 LG엔솔·에쓰오일, ‘운영’은 보험사 주도
상환용 다음으로 비중이 컸던 운영용 자금(20.4%)은 주로 금융권이 주도했다. DB손해보험(1조 5470억 원), 현대해상(8000억 원), 하나금융지주(7800억 원), KB손해보험·한화생명보험(각 6000억 원) 등이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보험사들의 운영자금 수요가 많았던 이유는 자본적정성 규제(K-ICS) 대응과 운용자산 확대가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래 성장 동력을 의미하는 투자용 조달은 전체 발행의 5.7%에 불과했다. LG에너지솔루션이 배터리 설비 투자를 위해 총 1조 1250억 원을 발행하며 1위를 차지했고, 에쓰오일(S-Oil)은 ‘샤힌 프로젝트’ 등 에너지 생산설비 투자를 위해 6800억 원을 조달했다. 이어 SK브로드밴드(5300억 원), 한국금융지주(4500억 원), 포스코(3532억 원) 순이었다.
그룹별로는 LG그룹의 행보가 단연 돋보였다. 전체 조달액 3조 3600억 원 중 45%를 투자(1조 1250억 원)와 운영(3900억 원)에 투입하며 주요 그룹 중 가장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포스코그룹은 투자용에 3532억 원(20.3%)을, 삼성그룹은 전체 발행액 1조 5000억 원 중 투자와 운영 목적으로 각각 2000억 원씩을 배정했다. 현대차그룹은 운영용 1조 1147억 원을 확보하며 재무 관리의 내실을 기했고, 한화그룹은 금융 계열사의 운영 자금과 제조 계열사의 차환 자금을 조달하며 균형을 맞췄다.
‘금리 정체기’ 진입…신용도 따라 스프레드 양극화
2026년 채권발행시장은 기준금리 방향성보다 기업별 신용도에 따른 조달 여건 차이가 더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행은 2025년 10월 이후 2026년 1월까지 기준금리를 다섯 차례 연속 동결하며, 물가와 환율 등 대내외 여건을 고려한 동결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기준금리 추가 인하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시점과 속도를 둘러싼 시장의 전망은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다만 기준금리 흐름과 달리 기업들의 자금 조달 여건은 획일적으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 주요 신용평가사들의 산업 전망에 따르면 반도체·조선·방산 업종은 실적 개선과 수주 증가에 힘입어 신용도 회복 흐름이 나타나는 반면, 건설·석유화학·이차전지 업종은 수익성 둔화와 투자 부담으로 신용도 하방 압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크레딧 스프레드는 업종과 신용도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기업 간 조달 비용 격차도 오히려 확대되는 모습이다.
특히 2023~2024년 고금리 국면에서 발행된 2~3년물 회사채의 만기가 올해 집중되면서 차환 수요가 한꺼번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 금리가 기대만큼 빠르게 내려가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단순히 등급이 높은 기업이 아니라, 현금 창출력을 증명해 보이는 기업에만 선택적으로 지갑을 열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우량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사이의 ‘그레이트 디바이드(Great Divide)’ 현상은 올해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두경우 한국금융신문 전문위원 kwd1227@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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