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최근 쓴 기사만 봐도, A 증권사가 IRP 수수료 면제 신호탄을 쐈다는 뉴스에 이어, B 증권사, C 증권사가 앞다퉈 수수료 전액 면제 행렬에 동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제 한 발짝 더 나아가, 비대면 가입뿐만 아니라 대면 IRP 가입까지 구분 없이 수수료 무료를 내건 증권사들도 나와 지평을 넓히고 있다.
연이은 수수료 면제 선언을 보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증권사들이 그야말로 퇴직연금에 ‘진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배경을 보면 빠르게 성장하는 퇴직연금 시장이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의 ‘2020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황 통계’에 따르면, 2020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255조5000억원에 달한다. 제도 유형 별로 보면 확정급여형(DB)이 전체 255조원 규모 시장에서 153조9000억원에 달해 비중이 60.2%로 여전히 지배적이다.
여기에 실적배당형 투자 영역이 되는 확정기여형(DC)과 IRP를 합한 적립금이 작년에 사상 처음으로 100조원을 돌파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증권사들의 IRP 수수료 면제 행렬은 퇴직연금 시장 주도권 잡기로 풀이할 수 있다. IRP 계좌에 부과되는 수수료에는 운용관리 수수료와 자산관리 수수료가 있는데, 이 두 가지를 합할 경우 가입자가 부담하는 수수료는 연간 0.1~0.5% 수준에 이른다. 증권사들은 ‘수수료 0원’으로 투자자 유치에 승부수를 건 셈이다.
연금처럼 장기 납입하는 자금의 경우 ‘시간의 힘’이 지배하기 때문에, 지금은 별 것 아닌 것 같은 수수료 차이가 나중에 보면 실제 수익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아울러 ‘서학개미’ 투자자들이 절세 측면에서 연금 계좌를 찾는 점도 부각되고 있다. IRP 계좌에서 해외주식형 펀드나 국내 상장된 해외자산 추종 ETF(상장지수펀드)를 거래할 경우 발생 차익에 대해 일반계좌 배당소득세(15.4%) 대비 낮은 연금소득세(3.3~5.5%)가 과세된다.
일단 퇴직연금 가입자 입장에서 본다면 ‘고인 물’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경쟁이 불붙는 게 반갑다. 실제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이른바 ‘쥐꼬리 수익률’에도 금융회사들이 수수료는 꼬박꼬박 챙겨간다는 불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퇴직연금은 그동안 자금 성격상 안정성이 강조되는 만큼 원금보장형에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다시 말해 별다른 운용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측면이 있다. 저금리가 이어지면서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수익률 대비 비용 부담에 대해 어느 때 보다도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실적배당형 상품 투자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적극적인 투자 인식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이는 최근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을 만났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인 ‘머니 무브(Money Move)’와도 결부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평생 은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분들이 최근 증권사 신규 고객으로 유입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퇴직연금 관련 논의를 보면 자칫 머리(가입자)와 꼬리(금융회사)가 뒤바뀔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증권, 은행, 보험 등 금융업권 간 경쟁 구도 때문이다. DC형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도입 추진 등에 대한 대립 양상이 대표적이다.
이해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만큼 경쟁 구도가 업권 간 ‘밥그릇 싸움’처럼 비춰지는 것은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한 금융투자 분야 연구원은 “퇴직연금 제도는 개인의 노후소득이라는 사적영역을 국가가 기업을 통해 공적으로 강제하는 측면이 있다”며 “여기에서 금융이 맡는 역할은 제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한 번 곱씹어 볼 만하다.
그야말로 퇴직연금 신(新) 경쟁 시대가 열리고 있는 분위기다. 목표점은 명확하다.
금융회사들은 퇴직연금 주체인 가입자에게 수익률 성과로 보답하는 것이야말로 건설적이고 유익한 경쟁이라는 점을 다시금 새겨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정선은 기자 bravebambi@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