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의의 물가'인 GDP 디플레이터는 작년 4분기(-0.1%) 이후 4분기 연속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이다. 마이너스 폭은 계속 확대됐다.
지난 2010년대 중반 GDP 디플레이터 둔화가 저물가, 혹은 디플레의 전조에 대한 우려를 부각시킨 뒤 올해도 이를 걱정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특히 GDP 디플레이터 하락률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2분기(-2.7%) 이후 가장 두드러졌다.
■ GDP 디플레이터의 계속된 하락
GDP 디플레이터는 소비자·수출·수입물가지수 등을 모두 반영해 국민경제 전반의 종합적인 물가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다.
디플레이터를 쪼개 보면, 우선 내수 디플레이터 상승률은 1.0%로 민간소비와 설비투자를 중심으로 2분기(1.7%) 대비 0.7%p 둔화했다.
수출 디플레이터 상승률은 -6.7%로 반도체·화학 수출가격이 크게 떨어지면서 전분기(-2.0%)보다 하락폭이 확대됐다. 수입 디플레이터도 0.1% 하락했다.
경기 둔화와 국내 수출품 가격 하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GDP 디플레이터는 둔화되고 있는 것이다.
신승철 한국은행 국민계정부장은 이날 국민계정 설명회에서 "소비자물가 상승세가 둔화되면서 민간소비 디플레이터가 낮아졌다"면서 "설비투자 디플레이터는 환율 상승폭이 축소되면서 수입 자본재를 중심으로 오름세가 둔화됐다"고 말했다.
그는 "수출 디플레이터 하락폭 확대는 반도체·석유화학·철강 등 주력 수출품목 가격이 하락한 영향이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아무튼 '광의의 물가'가 낙폭을 확대하면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있다. 한은은 일단 이 부분에 대해 선을 긋고 있다.
신 부장은 "최근 디플레이터 하락은 국내 물가 수준과 상관없는 수출가격의 큰 폭 하락으로 인한 현상"이라며 "GDP 디플레이터 하락을 디플레이션과 연관해서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국내와 같이 GDP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반도체와 유가 등 수출입가격의 변동폭이 큰 상황에서 GDP 디플레이터로 국내 물가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신 부장은 "소비자물가지수가 소폭 올라가고 있고, 반도체 가격 하락폭도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GDP 디플레이터가 플러스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 완화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 GDP 디플레이터 추락, 소모적 디플레 논쟁으로 연결되선 실익 없어
올해 8~10월 월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4~0.0%로 나타는 등 저물가가 한국경제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4분기 연속 GDP 디플레이터가 마이너스를 나타내는 등 초저물가는 우리 경제의 앞날에 먹장구름을 드리우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올해들어 한은의 물가안정목표인 2%보다 훨씬 낮은 0%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1개월 연속 이어졌다.
현재 상황은 디플레이션의 통상적인 정의, 즉 물가수준이 광범위하게 장기간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여러 물가지수가 제대로 반등하지 못한지는 오래됐으며, 이러다가 한국경제가 아예 활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조바심도 엿보인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지난 몇 년간 물가가 목표를 하회하고 있다. 금년 들어서는 0%대 물가가 지속되고 있다"면서 "근원물가도 0%대를 보이면서 20년만의 최저치를 나타내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오늘 나온 GDP 디플레가 4분기 연속 마이너스라는 이유로 디플레이션 논란을 벌이는 것도 소모적이고 외부 요인 탓만 하는 것도 잘못됐다"면서 "우리 물가가 지나치게 낮구나, 이러다가 한국경제가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감대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짚었다.
여기에 기대인플레이션율이 1.7% 수준으로 낮아지는 등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치까지 낮아지고 있다.
이 관계자는 "기대 인플레가 계속 낮아지면 소비, 투자 지연이 우려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초저물가라는 게 결국 경기 활력이 굉장히 약하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 적극적인 거시정책?...금융안정이란 이름의 서울 부동산
한국의 실질성장률이 잠재성장률에 훨씬 못 미치고 있는 이 때에 디플레이션 논란만 이어가서는 실익이 없다는 지적도 많다.
올해 성장률이 2%를 달성하느냐 여부 등 특정 수치에 집착하는 것보다 지금은 한국경제의 만성화돼 가는 질환을 손보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도 강하다.
일각에선 물가가 한은의 관리목표(2.0%)에 비해 지나치게 낮기 때문에 내년에 물가가 좀 오르더라도 과감한 거시정책을 써야 한다고 보기도 한다.
현재 저물가에 워낙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대외여건, 대내여건, 구조적 요인, 경기순환적 요인 모두 섞여 있다.
이에 따라 경제 활력을 높일 소비/투자/수출 촉진책을 적극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많다. 디플레이션 논란을 벌이는 것보다 저성장의 고착화 탈피를 위해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사실 지나치게 낮은 물가는 저성장의 이면이다.
증권사의 한 채권딜러는 "내년 물가와 성장률이 올해보다 나아지더라도 경기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면서 "정부도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펴고 있지만, 어차피 성장률이 잠재수준을 밑돌 수 밖에 없어 내년 1~2차례 금리인하가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나타난 서울 아파트 가격의 폭등이 추가적인 통화정책 완화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진단도 보인다. 사실 가계부채 문제 역시 부동산의 이면이기도 하다.
앞의 금융당국자는 "지금은 건설경기도 안 좋고 부동산 거래가 많은 것도 아닌데 서울 아파트 가격은 급등했다"면서 "사실 금리를 더 내려선 안된다는 이유엔 자본유출 우려보다 서울 아파트에 대한 경계감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는 "부동산은 사회, 경제적으로 큰 문제다. 이 부분이 정책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은의 판단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눈치를 보던 한은이 향후 미국의 통화정책 완화 시그널에 맞춰서 움직일 것이란 인식도 있다.
운용사의 한 매니저는 "지금은 부동산 양극화가 극대화됐다"면서 "문제는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 정책 실패로 서울 아파트값이 폭등한 뒤 한은도 마음대로 금리를 내릴 수 없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달려들기보다는 미국 쪽에서 시그널이 나와야 움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태민 기자 chang@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