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민간기업들에까지 임금피크제 도입의 길을 터 주는데 앞장 선 가운데 은행권이 직면한 현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장기근속자들을 중심으로 사실상 명예퇴직이나 다름 없는 희망퇴직이 모범답안으로 대두하면서 10년 대계를 짜도 부족할 판에 임기응변식 경영 기조가 일반화될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통계상으로 오는 2018년 인구절벽이 예정돼 있을 정도로 초고속 고령화가 진행 중인 가운데 정년연장 없는 임금피크제 확산이 대안처럼 간주되는 상황이 일방통행식으로 이어지다 보면 애초에 목표로 했던 전략적 비용절감도, 생산성과 경쟁력 강화도 충분한 성과를 이루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근속자를 일선에서 제외시키면서 단순 업무나 맡기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인지, 차라리 거액의 명퇴금을 지급하고 조기 은퇴하는 것이 생산성에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지, 금융사 조직 내 세대간 갈등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아직 뚜렷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처지다.
전반적인 분석과 검토를 통해 약 10년 뒤, 정말로 금융산업을 대한민국 주력산업으로 끌어 올리려면 인재양성과 조직역량, 그리고 산업경쟁력까지 아우르는 원대한 전략과 계획을 세울 때라는 지적이다.
◇ 걸어온 길·영업규모 최적화는 간데 없고
국회 정무위 김정훈 의원이 16일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토대로 내놓은 정규직원 대비 중간간부 비중은 그동안 숱하게 거론됐던 이른바 ‘항아리형’ 인력구조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김 의원은 부서장과 지점장(부·점장)과 팀장과 부지점장 등을 중간간부로 규정한 뒤 정규직 직원 수에 비해 얼마나 차지하는지 소상히 알렸다. 5월 말 현재 7대 시중은행 정규직 6만 6139명 가운데 부·점장은 6210명이었고 팀장과 부지점장은 1만 2039명으로 중간간부 단순평균 비율은 27.6%였다고 전했다. 물론 은행별 편차는 컸다.
출장소를 뺀 업무 전반을 볼 수 있는 점포망 기준으로 가장 많은 국민은행은 간부 숫자가 가장 많으면서도 그 비중은 시중은행 평균을 밑도는 25.2%였다. 신입행원 채용을 장기간 하지 않았던 외환은행과 직책 운영을 다른 시중은행과 달리하고 있는 스탠다드차타드은행 간부 비중은 6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 기준 점포망 차이는 90개 정도인 우리은행과 신한은행 간부 숫자가 3498명 대 3080명으로 차이를 나타내기도 했다. 은행권 관계자들은 선발시중은행을 모태로 한 곳과 후발시중은행 중심인 곳이 다를 수밖에 없고 점포를 비롯해 외형성장 전략을 택한 곳과 내실 위주 전략을 택한 곳이 같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은행권에서 10년 앞을 내다보고 큰 계획 아래 인력조정이나 양성에 나선 적이 없다 보니 사회적 압력에 취약해지는 상황을 자초했다.
◇ 도태 일쑤 임금피크 비용절감 명퇴만 반복
대한민국 사회에선 조직 안에서 상대적 고령층인 장기근속자를 임금피크제에 적용시키거나 일찌감치 은퇴를 강요하는 상황까지 무릅쓴 명예퇴직을 시키는 것이 정답이라고 강권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 사회적 논의가 흐르는 방향이나 도입된 지 약 10년 흐른 은행권에 실제 적용 상황을 보면 임금피크제와 명예퇴직은 단순한 비용절감 목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혹평을 듣고 있는 실정이다.
A시중은행 한 간부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놓은 은행들의 경우 고령화를 앞둔 정년연장 취지를 살리려고 모색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정년연장 효과는 크게 보지 못하고 조기 은퇴를 촉진하는 경향도 나타났다”고 말했다.
아울러 대략 58세이던 정년을 60세로 늘리는 대신 최종 근무 기간 동안 단계적으로 줄어든 임금을 받는 것이 뼈대인 임금피크제는 대상자가 늘면서 어떤 업무를 줄 것이냐가 문제로 떠올랐다. 후선업무로 돌리거나 1인지점장 형태의 영업직 전환은 생산성 문제를 낳고 일선 부서나 점포에 배치하자니 현역 후배들과의 갈등을 낳았다.
여기다 정년연장 성격 임금피크제가 정착도 못한 상태에서 청년실업 촉진을 위한 임금피크제 도입 주장이 불거진 것도 은행권과는 매우 동떨어진 상황으로 지적받고 있다. 고령화에 대비하려면 소득 없이 버텨야 하는 기간을 최소화 해야 하는데 우리 나라는 그런 기간을 늘리는 정책이 권장되는 기현상을 빚고 있는 셈이다. 임금피크제와 명퇴가 반복되는 가운데서도 은행은 꾸준히 채용을 늘리며 청년실업 해소에 앞장서 왔지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대신 임금체계 개편 논의로 노사가 대립할 상황을 앞두고 있다.
◇ 고액연봉 장기근속자 줄이고 나면
금융노조 한 고위관계자는 “임금피크를 목전에 둔 은행원들의 경우 희망퇴직을 자발적으로 원하는 경우까지 나타난 것은 알고 보면 뼈 아픈 일”이라고 주장했다. 명퇴를 자처하는 장기근속자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세대 갈등 성격에 기인한 측면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인 경우가 대표적으로 두 가지 요인 모두 걸쳐진 사례도 많다고 한다.
입행 이후 숱한 업무성과에도 불구하고 임원급 승진을 하지 못한 채 임금피크제 대상이 되고 나면 과거에 비해 비중이 떨어지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조직 내 후배들에게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기회가 닿는다면 두둑한 퇴직금을 받고 은퇴하는 길을 택하는 경우다.
임금피크 상황에서 소득 상실감이 커지느니 목돈을 받고 퇴직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선택도 많은 사례를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은행간 생산성이나 경쟁력 변동과정을 보면 명퇴를 꾸준히 했다고 해서 남다른 성과를 거두었다는 설득력 있는 지표는 없지 않느냐는 뜻 깊은 반문이 나오고 있다. 10년을 내다보는 인력양성과 생산성 그리고 경쟁력 강화방안 속에서 임금과 인재개발 큰 판을 짜려는 경영진과 노조의 공동노력이 절실한 때다.
정희윤 기자 simmoo@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