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평가사 본연의 책무 수행 중요성 커져
추석 몇일 전, 당사 출신의 자본시장 참가자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기회가 있었다. 식사 도중 최근 금융시장 동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명이 이제 국내에도 본격적인 ‘신용평가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코멘트를 하였다. 그러나 Moody’s나 S&P와 같은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이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 제공자 중 하나로 외국 언론 및 금융감독 당국의 집중포화를 받고 있는 시기에, 국내 신용평가사의 대표를 맡고 있는 나로서는 오히려 위기의식과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니나다를까, 추석 명절을 지나면서 전세계 금융시장은 급변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인 리만브라더스, 메릴린치는 각각 파산보호 신청 및 Bank of America로의 피인수로 화려한 역사를 마감하였고, 미국의 대표적인 보험사인 AIG조차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활로를 찾는 등 미국 금융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고, 유럽의 금융시장으로도 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더 심각한 것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미국 및 전세계 실물경제의 침체로 전이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유럽과 일본 경제는 2분기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최근 수년간 세계경제성장의 엔진역할을 하였던 중국과 인도 경제의 성장세도 위축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전개되는 금융시장 및 실물경제의 위기는 미국을 비롯한 대외부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선, 직접적인 손실로 국내 금융기관들이 보유한 자산가치 하락을 들 수 있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는 서브프라임 관련 자산과 부실화된 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에서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현재까지 파악된 금액은 1조원 미만이나 향후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인 손실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내 금융시장 및 실물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신용경색에 따른 국제 금융시장의 경색으로 정부, 공기업, 금융기관의 해외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국내 금융시장에 달러 부족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이는 원화환율 및 국내 금리의 상승과 국내 금융시장의 경색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국내 기업의 KIKO(Knock-in, Knock-out)관련 손실 누증, 자금조달 비용 상승, 소요자금 조달 실패 등 금융여건이 악화되고 있다. 실물경제 측면에서도 해외 경제의 침체에 따른 수출 경기 악화,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라 기업의 수익성 및 현금흐름이 저하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러한 기업의 수익성과 현금흐름 저하는 신용위험의 상승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신용평가사는 신용위험을 일정한 기호를 이용한 신용등급으로 표현하여 금융시장 참가자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작금과 같은 위기상황은 기업들의 신용위험의 변동성이 평상시보다 크게 높아지는 시기이며, 그에 따라 언론 및 금융시장이 신용평가사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시장의 변동성이 커질수록 적기에 신용등급의 적정성을 평가하여 시장참가자에게 제공하여야 하는 것이 신용평가사의 책임이다. 그러나 부도발생 가능성이 있는 경우 신용등급의 과도한 하향조정으로 오히려 기업의 부도위험을 증폭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적기에 시장참가자에게 신용상태의 변화를 알리는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너무 늦어도 안되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선제적인 신용등급 하향조정으로 기업과 시장이 안고 있는 위험을 과도하게 증폭시켜서도 안 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예측불허의 국내 금융시장 및 실물경제의 위기 상황은 국내 신용평가사로서는 신용평가의 신뢰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기회이다. 비 온 뒤 땅이 더욱 굳어지듯이 신용위기는 국내 신용평가사에게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다. 10년 전 발생하였던 외환위기는 국내 금융시장 구성원으로 하여금 신용평가의 중요성을 일깨워 우리나라 신용평가산업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데 기여한 바 있다. 미국에서도 1930년에 발생한 대공황은 신용평가의 존재의의와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 바 있다.
漢字로 위기(危機)는 위험과 기회가 결합되어 생긴 단어라고 한다. 국내외 경제 위기는 한국에 있어 위험 요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발전을 위한 기회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 신용평가사들도 작금의 어려운 상황을 맞아 움츠려들기 보다, 신용평가사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고 내적 역량 제고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진정한 ‘신용평가의 시대’를 이끌어 내야 할 것이다.
관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