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컨대 자칭 독자수가 제일 많다고 자랑하는 신문이 어느날 앞으로 부수 확장 경쟁을 더 이상 안하겠다고 선언하거나 아줌마들을 웃고 울리며 제일 높은 시청율을 자랑하는 드라마 프로의 PD가 이제 시청율 경쟁은 의미가 없다며 앞으로는 다른 길을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동종 업계의 경쟁자는 물론 독자나 시청자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 증권 46년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졌다.
선두주자인 삼성증권이 이익감소를 감수하고서라도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약정고 올리기 경쟁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강자의 여유라는 비꼼과 새로운 미래를 위한 적절한 변신 시도라는 긍정적 시각이 공존한다. 어째든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신선한 충격이다.
증권업계만 구조조정 부진
IMF 이후 증권산업도 변화의 한복판에 섰었다. 업계는 몸을 사리면서 부분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결과적으로 시늉에 그쳤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증권업종은 지난 97년 IMF외환위기 이후 여타 업종이 빅딜 등을 통해 구조조정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오히려 새로운 증권사가 등장하고 매각작업도 진척을 보이지 않는 등 구조조정이 부진한 분야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구조조정이 지연된 주 이유는 그동안 당국의 저금리 정책으로 주식시장이 활황세를 타면서 그럭저럭 먹고 살만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증권산업은 사업다각화의 활로를 개척하지 못하고 수익의 대부분을 중개영업에 의존하고 있다. 증권사마다 차별성 없이 한 방향으로만 가면서 경쟁만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은 제살 깎아먹기라는 수익성 저하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온라인 주식거래비중이 70∼80%에 달하면서 과거 증시 활황기 때 보였던 수익성은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고 약정에 의존한 수익구조로 인해 과도한 회전이 일어나는 등 부작용을 낳고 있다.
증권사 직원들도 현재 증권영업의 최대 문제점을 증권사간의 지나친 시장점유율 경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증권노조가 지난달 증권사 직원 313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응답자 3070명중 38.1%가 시장점유율 경쟁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또 영업직원에 대한 약정 강요라는 답변도 36.5%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환경이 바뀐 것이다.
업계 선두주자인 삼성증권의 이번 선언으로 주식위탁영업에 의존하고 있는 증권업계의 수익구조 변화는 물론 궁극적으로 업계전반의 지각 변화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증권은 궁극적으로 위탁영업에서 30% 종합자산관리에서 30% 투자은행업무에서 30% 기타업무에서 10%의 수익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53% 수준인 주식위탁영업부문을 30%로 줄이는 대신 현재 20조원 규모인 수익증권 잔고를 서너배 끌어올려 종합자산관리 부문을 30%까지 올리겠다는 전략이다. 당연히 단기적으로는 수익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업계 1위라는 자리도 내주어야 할지 모르는 모험이다.
중소증권사 설자리 없어져
선두주자의 변신 선언에 이어 며칠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선언이 나왔다. 점유율은 낮았어도 43년 역사를 가진 건설증권이 스스로 간판을 내리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동서, 고려증권 등 강제로 퇴출된 증권사는 있었지만 증권사가 자진 청산하는 것은 증시 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건설증권은 한때는 증권사 가운데 처음으로 자체 건물을 가졌던 잘 나가던 증권사였다. 지난 90년대초 증권사 인가증의 프리미엄이 수백억원에 달할 때 삼성에서 인수하겠다고 했으나 비싼 몸값을 제시, 성사되지 않았다. 삼성은 그 후 다른 증권사를 인수, 현재의 업계 선두주자로 키워 놓았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과욕은 결국 파멸을 부른다는 교훈이라고 하겠다.
건설증권은 전직원 67명의 미니 증권사지만 창립은 지난 59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는 증권계 1세대 회사다. 손홍원 회장이 48.1% 등 친인척 지분이 70%를 넘는 개인회사다. 건설증권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온라인화 등 업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경영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래도 지난 2000 회계연도 호황기에는 매출액 224억, 순이익 73억원으로 큰 이익을 냈지만 지난해에는 매출액이 급감하고 106억원의 적자를 기록, 어려움을 겪었다. 2002년 회계연도에는 매출액 86억, 순이익 11억원으로 다소 호전된 모습을 보였지만 거대증권사와 온라인 증권사 사이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결국 좌초하고 만 것이다. 예탁자산이래야 현금과 주식을 합쳐 340억원정도이고 고객수는 6400명에 불과하다.
건설증권 자진 청산 소식이 알려지면서 남은 군소 증권사들은 “이제 올 것이 왔구나”하고 충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금융당국과 증권업계는 삼성증권의 변신 선언과 건설증권의 자진 청산이 증권업계 구조조정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건설증권 자진 청산은 이제 증권사 인가 프리미엄 값이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증권사들이 그동안 ‘우리 밥벌이는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라며 정부의 구조조정 권고에 시큰둥했으나 이제야 스스로 위기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삼성의 변신 시도가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렇듯 증권업계의 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업 집단이 모든 산업부문에서 1위를 독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번 삼성증권의 자발적인 변신선언은 시장이나 투자자의 의식이 어느 정도 뒷받침 해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미래와 생존에 대한 시금석이 된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화의 선도자가 가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개척해야만 할 길이다. 변화의 조타수, 황영기닫기

<강 종 철 논설위원>
강종철 기자 kjc01@epayge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