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옛부터 ‘빛이 밝으면 그림자가 더 짙다’거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거나 하는 말들을 전승해왔다. 항상 가볍게 흥분하지 말고 쉽게 좌절하지도 말라는 충고가 담겨있는 지혜의 말이다. 우리 경제의 주요 버팀목인 반도체 가격이 이제는 바닥을 쳤다는 믿음이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고 보이지만, 그 뒤로 길게 드러누운 그림자를 보지 못하면 언제나 그렇듯 끝은 더 큰 실망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시쳇말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실망하는 소리가 나오게 된다.
국민 대중의 어깨가 축 처져 있을 때는 물론 희망이 큰 자극이고 힘이다. 그렇다해도 경망한 몸놀림은 사고를 부르기 쉽다는 점에서 좀 진중한 자세로 변화를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대응해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지금 이미 우리 경기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는 크고 검은 그림자가 드러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우리를 걱정스럽게 하는 요소는 일본 엔화의 평가절하 행진이다. 달러당 140엔까지도 갈 수 있다고 일본으로부터 전해지는 소식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구호가 여전히 위력을 떨칠 수밖에 없는 우리 경제구조상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지 않은가. 130엔 선에서 공방중인 연초에 이미 100엔 기준 가격이 우리 돈으로는 997원까지 떨어졌으니 140엔대까지 절하되면 일본과 가격경쟁을 벌여야 하는 수출기업들은 초비상 사태가 올 것이다.
자본시장이 개방되기 전 같으면 그런 비상 상황은 수출기업 외에 이렇다하게 큰 타격이 없을 수도 있다. 오히려 엔화 부채가 많은 기업들 입장에서는 이를 호기로 이용할 여지조차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비율이 대폭 높아진 현재 상황에서 일본의 인위적인 엔화 평가절하는 국내 자본시장을 순식간에 뒤흔들어버릴 폭탄으로 돌변할 가능성도 있다. 단시일내에 자금이 국내시장을 빠져나가 일본으로 유입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유동성이 매우 커진 국제 금융자본을 염두에 두지않고 경기 전망을 하는 것은 자칫 사상누각이 될 위험성이 높다.
엔화의 인위적인 평가절하는 장기적이고도 구조적인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기 위한 일본의 극약처방이라고 봐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해외 투자자산의 일본 국내 환류를 통해 일본 시장을 되살려보고자 하는 기대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하이닉스 반도체 건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있는 국내의 반도체 산업에 국제적으로 유일한 경쟁상대는 일본이다. 그런 일본이 엔저로 대응해 일본 반도체의 경쟁력을 키우려는 의도는 과연 없을까도 생각해볼 일이다.
반도체 재고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엔저의 심화는 분명 우리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체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10%대로 낮다는 일본이지만 세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D램 반도체 부문에서 유일한 경쟁국인 한 일간 가격경쟁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다.
빛은 빛으로서 향유하되 그림자의 존재는 단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도 이제 어차피 세계 무역및 자본시장을 상대로 전방위 경제활동을 펼쳐야 하는 개방화 시대, 세계화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조심스럽게 대비하고 나아가야 한다. IMF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던 그 직전까지 우리 사회에 팽배했던 낙관론들을 상기해보면 더욱 그렇지 않은가.
관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