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문명의 끝에서 전기 문명을 기다린다 [전명산의 AI블록체인도시 이야기⑨]](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60420152905003820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에너지 전환은 곧 전기 문명으로의 이행
인류의 문명은 늘 에너지의 문명이었다. 나무를 태우던 시대, 석탄을 태우던 시대, 석유를 태우던 시대. 우리가 사는 문명의 이름은 결국 무엇을 태워 에너지를 얻는가로 결정되어 왔다. 그리고 지난 200년 동안 인류는 땅 속에서 꺼낸 탄소를 태우면서 문명을 운영해 왔다.지금 우리는 그 문명의 연료를 바꾸는 과도기에 있다. 기후 위기와 환경 오염에 직면한 21세기 인류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인류의 공동 목표로 ‘에너지 전환’을 제시했다. 만약 인류가 성공적으로 ’에너지 전환’이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기 문명’의 탄생이다. 지금은 전기 문명(Electric Civilization) 으로의 이행기다.
전기 문명이란 인류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거의 대부분을 전기로 대체하는 것이다. 자동차는 기름이 아니라 전기로 달리고, 집은 가스가 아니라 전기로 데우며, 공장은 화석연료가 아니라 전기로 가동된다. 난방도, 조리도, 이동도, 생산도, 거의 모든 에너지 소비가 전기 하나로 수렴하는 문명이다.
거의 모든 것을 전기화하라
왜 에너지 전환이 필요한가. 가장 명료한 답을 제시한 사람은 미국의 발명가이자 엔지니어인 소울 그리피스(Saul Griffith)다. 맥아더 펠로이자 『일렉트리파이(Electrify)』의 저자인 그는 기후 위기에 대한 자신의 해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거의 모든 것을 전기화하라(Electrify almost everything)."그의 논거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효율이다. 그리피스는 우리가 모든 것을 전기화하면 현재 사용하는 에너지의 절반 수준만 있어도 된다고 말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연기관은 연료를 태워 그 열로 동력을 얻는데,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에너지가 열로 낭비 된다. 휘발유 자동차는 연료가 가진 에너지의 약 30%만 실제 주행에 쓰고 나머지는 폐열로 날린다. 반면 전기차는 그런 폐열 손실이 거의 없어, 배터리 에너지의 대부분을 주행에 쓴다. 전기는 친환경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압도적으로 효율적인 에너지다.
그리피스가 거듭 강조하는 것이 있다. 전기화를 위한 기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 미래의 기술이 아니다. 지금 당장 전기화를 시작할 수 있다.
전기의 진짜 힘 — 탈지정학적 에너지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한국에게 전기 문명은 단순한 효율성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화석연료는 본질적으로 지정학적 에너지다. 석유와 가스는 일부 지역에 편중되어 있고, 교역마저 호르무즈 해협 같은 소수의 길목에 의존한다. 그래서 자원을 가진 쪽이 그렇지 못한 쪽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하면 한국은 그 권력에 휘둘리는 구조다.
전기는 다르다. 전기는 기술만 있으면 어디서든 에너지를 만들 수 있게 한다. 햇빛과 바람의 양에는 지역차가 있지만, 화석연료처럼 특정 국가가 공급을 틀어쥐는 자원은 아니다. 이후에 도입될 SMR과 인공태양도 마찬가지다. 전기는 본질적으로 탈지정학적 에너지에 가깝다. 기술을 가진 나라는 에너지 자립이 가능하다. 자원이 없어도, 수입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주목할 것은, 한국이 이 기술 경쟁에서 결코 뒤처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태양광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특히 차세대 태양전지로 주목받는 페로브스카이트의 효율 경쟁에서는 글로벌 선두권을 달리고 있다. 페로브스카이트 상용화를 위한 내구성 확보 문제가 남아 있지만, 에너지 자립의 기술적 토대를 우리 스스로 쌓아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전기의 또 다른 특징은 자유로운 변환 능력이다. 전기는 거의 모든 형태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 열로, 빛으로, 동력으로 바뀌고, 수소나 암모니아로 바뀌어 저장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전기로 공기 중의 탄소를 포집하고 물에서 얻은 수소와 결합하면 석유나 가스를 다시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른바 합성연료(e-fuel)다. 즉 전기를 석유나 가스로 거꾸로 변환하는 기술도 이미 개발되어 있다. 이처럼 전기의 자유로운 변환 가능성은 전기를 문명의 보편 에너지로 만드는 핵심 요인이다.
물론 석유나 가스가 반드시 필요한 영역들은 존재한다. 또한 합성연료는 아직 비용이 높아, 평상시에 석유를 대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에너지 위기 상황이라면 의미가 달라진다. 중동의 전쟁처럼 지정학적 리스크가 극대화되어 석유 공급과 가격이 통제 불능에 빠질 경우, 전기 기반의 탄소 포집·합성 기술은 위급 상황의 대체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 합성 연료 기술을 확보해 두는 것은 에너지 안보를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기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전기 문명을 구축할 기술들은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다.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태양광은 지난 10년 동안 발전 단가가 급락해, 이제 많은 지역에서 가장 싼 전력원이 되었다. 더 주목할 것은 그 하락 속도다. 지난 10여 년간 태양광의 성장 속도는 해마다 예측을 앞질렀다.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전환 속도보다, 실제 전환이 더 빠르게 진행돼 왔다는 뜻이다. 풍력도 마찬가지다.
해가 지면 태양광이 멈추고 바람이 잦으면 풍력이 쉬는 간헐성 문제는 ESS(에너지 저장 시스템)가 해결해 가고 있다. 배터리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저장 용량은 계속 늘어난다. 전기를 저장하는 방식도 배터리에 그치지 않고 다양해지고 있다.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렸다 내리며 중력으로 저장하는 방식, 모래나 소금을 가열해 열로 저장하는 방식, 거대한 바퀴를 돌려 회전 운동으로 저장하는 방식, 수소나 암모니아로 바꿔 저장하는 방식 등 더 저렴하거나 더 오래 저장할 수 있는 기술들이 곳곳에서 상용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전기를 싸고 안전하고 효율적이고 장기적으로 저장하는 여러가지 기술들이 개발되고 있으며, 일부 기술들은 상용화 단계에 들어서 있다. (그래픽: 생성형AI활용)
난방의 전기화에는 히트펌프가 있다. 히트펌프는 전기로 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열을 이동시키는 장치로, 투입한 전기의 서너 배에 해당하는 열을 만들어 낸다. 가스보일러보다 압도적으로 효율적이다. 이 기술들은 상당 부분 상용화된 상태다.
물론 모든 것이 당장 전기화되는 것은 아니다. 항공, 해운, 철강, 시멘트, 그리고 플라스틱·비료 같은 화학 산업은 전기화가 가장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 있다. 특히 화학 산업에서 탄소는 태우는 연료가 아니라 제품을 이루는 원료다. 전기로 열은 대신할 수 있어도 탄소 분자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 영역들은 앞으로 수소, 합성연료, 탄소 포집 같은 기술을 통해 서서히 전환될 것이다.
AI 시대는 더 많은 전기를 필요로 한다
AI 시대에 전기의 중요성은 한 단계 더 커진다.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기를 소비한다. 드론도, 휴머노이드 로봇도, 자율주행 차량도, 도시의 수많은 센서와 디바이스도 모두 전기로 돌아간다. 그 동안 화석연료가 담당하던 수요까지 전기로 옮겨오기 때문에 전기 수요는 그만큼 폭증한다. 이것을 거꾸로 해석하면 전기 부족은 도시 문명 발전의 지체와 직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기화를 가속하면서 전기 생산량을 더 늘려야 하는 이유다.
전기화는 도시 운영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도시 에너지가 전기·가스·석유로 흩어져 있으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관리할 수 없다. 그러나 에너지가 전기로 일원화되면, 도시 전체의 에너지 생산·저장·소비를 하나의 운영 체계로 통합 관리할 수 있다. 앞선 회에서 다룬 가상발전소(VPP), AI 기반 그리드 운영, 시민 가정 배터리의 충방전 조율 등 이 모든 것은 에너지가 전기로 통합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전기 문명으로의 전환은 AI 기반의 도시 운영 체제의 전제 조건이다.

▲도시에서 사용되는 에너지 전체를 전기로 전환하면 AI 기반으로 전체 에너지 생산, 저장, 소비를 최적화할 수 있다.
도시의 전기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도시의 전기화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시작되었다.유럽은 도시에서 탄소를 떼어내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네덜란드는 2026년부터 건물에 화석연료 보일러 설치를 금지한다. 독일은 대도시들에 2026년까지 탄소중립 난방 전환 계획을 제출하도록 했고, 오스트리아는 신축 건물에 화석연료 보일러를 금지했다. 아일랜드도 가스·석유 보일러 설치를 금지했다. EU는 2040년을 화석연료 보일러 단계적 퇴출의 목표 시점으로 잡았다.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독일에서는 2024년, 히트펌프 판매량이 전체 신규 난방 설비의 48%에 도달하며 가스보일러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2026년 1분기 판매량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34% 증가했다. 도시의 난방이 가스에서 전기로 넘어가는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도시 전역에 저렴한 가스를 공급하는 가스관이 필수였던 도시가, 이제 가스관을 걷어내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우리 기업들도 움직이고 있다. 삼성은 2026년 초 냉난방과 온수를 하나의 실외기로 해결하는 고효율 히트펌프(EHS All-in-One)를 유럽 시장에 출시했고, LG도 통합 히트펌프 솔루션을 내놓으며 유럽 시장을 본격 공략하고 있다. 두 회사 모두 유럽의 보일러 퇴출 시한을 앞두고 공조·냉난방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전기 문명의 미래에 베팅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대의 이정표 - 전기 문명
지난 시대의 도시를 정의한 것은 기술이었다. 산업도시는 공장과 철도로, 현대 도시는 자동차와 고속도로로 자신을 정의했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 동안 도시들은 스마트시티라는 이름으로 센서와 네트워크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앞으로 누군가 인류의 미래를 제시하는 도시 모델로 이정표를 찍고자 한다면, 그 도시는 분명 전기 문명 도시가 될 것이다. 그것이 정해진 미래이기 때문이다.필자가 이 칼럼을 통해 그려온 도시, 시민이 에너지를 소유하고, 그 수익으로 시민들이 기본소득을 받고, AI가 도시를 운영하고 블록체인이 신뢰를 떠받치는 도시. 그 도시가 바로 전기 문명 도시다. 우리는 지금 그 이행의 한가운데에 있다. 탄소 문명의 끝, 전기 문명의 시작 지점.
전명산 소셜인프라테크 대표는
블록체인 전문가로 기술과 사회시스템의 구조적 변화를 연구하는 기획자이자 개발자이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 산업에서 25년 이상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 최초 블로그 미디어 ‘미디어몹’을 기획한 바 있다. SK커뮤니케이션즈(싸이월드) R&D 연구소 팀장 등을 거쳐 블록체인 플랫폼과 분산시스템 기술을 개발해왔다. 현재 (주)소셜인프라테크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며 오랫동안 천착해 온 블록체인 거버넌스 연구를 바탕으로 AI·블록체인·에너지·도시 인프라를 결합, 기본소득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 체제로 전환하는 전기 문명 프로토타입 ABCity(AI Blockchain City)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책 『가속해도 괜찮아! ABCity-AI 시대를 위한 전기 문명 프로토타입』(2026)을 냈다.
전명산 칼럼니스트/소셜인프라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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