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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송이 꽃이 나비가 된다”

장종회 기자

jhchang@fntimes.com

기사입력 : 2026-03-10 17:28

토포하우스서 김홍년 개인전 열려
30년 나비 탐구의 집대성한 전시

김홍년 작 화접(花蝶), 240×400cm, Acrylic, 2025-26

김홍년 작 화접(花蝶), 240×400cm, Acrylic, 2025-26

[한국금융신문 장종회 기자] '감정 구조화' 대형작 16점 선뵈

화면 앞에 서는 순간 압도된다. 붉고 깊은 우주 한가운데 수천 송이의 꽃들이 날개 모양으로 배열돼 거대한 나비를 이루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또다른 세계가 열린다. 각각의 꽃은 저마다 다른 색의 온도와 질감을 지닌 독립적인 존재다. 그 조각들이 함께 모여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날아오를 듯하다.

김홍년 작가의 개인전 '화접(花蝶), 감정의 구조화…행복 날다'전이 11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토포하우스에서 열린다. 층고 4.6m의 자연 채광 전시 공간을 채운 것은 240×400cm, 220×420cm에 달하는 대형 캔버스 16점이다. 나비 한 마리 한 마리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화폭 위에서 날갯짓을 한다.
김홍년 작 화접(花蝶), 220×220cm, Acrylic, 2024

김홍년 작 화접(花蝶), 220×220cm, Acrylic, 2024


감정은 '표현' 아닌 '구조'

김홍년의 화접 연작이 다른 꽃 그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은 여기다. 그는 꽃을 감정의 '은유'로 쓰지 않는다.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기쁨, 희망, 사랑 같은 감정의 최소 단위이고, 그 집합이 나비라는 존재의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게 그의 조형 철학이다. 인간이란 단일한 감정이 아니라 복합적인 감정의 구조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화폭으로 풀어낸 셈이다.

나비의 좌우 날개는 겉보기엔 대칭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색의 농도도, 꽃의 배열도, 리듬도 미묘하게 어긋난다. 김 작가는 이 불일치를 '결함'이 아닌 '조건'이라고 본다. 감정이란 결코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지 않고, 기억과 경험은 좌우로 동일하게 분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어긋남이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얘기다. 김 작가가 "하나의 날개로는 날 수 없다"고 말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물감 대신 시간을 쌓은 화면

김 작가의 화접 작품들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화면은 '그려진 것’이라기 보다는 '쌓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장미와 아이리스 꽃잎은 두텁게 올라간 마티에르(matière) 속에서 실제 꽃잎의 육질을 연상시킨다.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표면이 미묘하게 반사되면서 한 겹 한 겹의 결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작은 들꽃들은 붉은 배경 안으로 녹아 들어 화면 전체의 밀도를 조율한다.

화폭에 올라간 두께는 단순한 기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반복과 체류, 노동과 숙고가 응고된 흔적을 드러낸다. 1980년대 물성 회화에서 출발한 작가의 관심사가 감정이라는 비가시적인 것을 통해 어떻게 촉각적 실체로 전환시킬 것인가라는 질문과 답으로 이어진다.

반세기 화업 여정 집대성

올해로 화업 50년에 가까워지는 작가의 이력은 짧지 않다. 홍익대 대학원과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원을 거친 그는 1980년대 초 실험적 미술그룹 '난지도'를 창립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전환기를 이끌었다. 물질의 존재성을 탐구하던 그는 1996년부터 나비를 핵심 상징으로 삼기 시작한 뒤 30년간 삶과 공존, 존재와 감정, 사회적 연대의 문제를 나비라는 조형 언어로 지속적으로 갈고 닦았다.

김 작가는 국제 무대에서의 이력도 탄탄하다.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 뉴욕 첼시 개인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꽁빠레죵 초대 등 국내외 23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2023년에는 맨해튼 타임스퀘어 대형 전광판에 화접 영상이 송출되며 K-아트의 위상을 알리기도 했다. 삼성 갤럭시 Z플립 출시 콜라보, 주얼리 브랜드 티르리르와의 협업은 순수 회화가 산업 영역으로 확장되는 사례를 보여줬다. 정부종합청사에 소장된 그의 작품들은 제도적 신뢰를 더하고 있다.

전통적 길상의 이미지를 화면에 구현

화접은 동아시아 전통 회화에서 번영과 장수를 기원하는 길상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김 작가는 이 상징을 외적인 기복의 차원에 머물게 두지 않는다. 그의 나비는 "당신의 감정은 살아 있는가"라고 묻는다. 내면의 감정이 메마르지 않고 여전히 피어 있는 상태, 말하자면 '안쪽의 복'을 화면 위에서 구현하려는 것이다.
김 작가의 전시회가 봄의 문턱에서 열리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피어남과 생성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계절에, 수천 송이의 꽃이 모여 나비가 되는 장면은 한층 깊은 울림을 준다. 전시 관람은 무료다.

장종회 한국금융신문 기자 jh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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