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버블 발생의 마중물: 금융자유화와 플라자 합의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31321473103554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 등은 일본의 자산 버블을 발생시킨 변위로 1980년대 초에 시행된 금융자유화와 1985년 9월의 플라자 합의를 들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세계적인 규제 완화 흐름과 미국의 금융시장 개방 압력에 부응하여 금융자유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국 경제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는 기존의 정부 주도 산업정책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인식하고 시장원리와 기업의 자율적 판단에 기반한 정책 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산업과 정부 간의 밀접한 협조 구조뿐만 아니라 기업과 은행 간의 상호출자 관계 역시 재편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기업의 지배구조도 주주 중심으로 확립되는 등 경제 운영 시스템에서 글로벌 스탠다드를 채택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 아래 운영되어온 기존 경제 시스템을 시장 자율성이 보장되는 체제로 전환하고자 했다. 오랜 기간 정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업구조를 민간 기업의 자율성과 시장 원리에 기반한 구조로 전환하는 한편 재무성의 엄격한 규제를 받아온 은행과 증권 부문 역시 규제 완화와 경쟁 촉진을 통해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금융시스템으로 재편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단계적으로 추진된 금융자유화는 재무성의 강한 규제와 보호에 익숙했던 호송선단식 일본 금융시스템에 경쟁과 효율성 제고라는 긍정적 변화를 유도한 촉매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은행들의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한 고위험 추구, 가계대출의 급증, 비금융기업들의 금융 재정거래 확대 등으로 이어져 자산 버블 형성에 마중물 역할을 했다.
시카고 대학의 아닐 카시야프(Anil Kashyap)는 일본에서 금융자유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은행들이 어려움에 직면한 근본 원인으로 규제 변화의 세 가지 측면에서 상충하거나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카시야프가 지적한 첫 번째 측면은 기업들이 직접금융시장에 보다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자금 공급자로서 은행이 갖고 있던 지배적 위치를 약화시킨 점이다.
두 번째 측면은 가계가 비은행 금융기관을 이용하는 데 관련된 규제 완화가 지연되고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가계 자금이 여전히 은행으로 집중되는 구조가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지적한 세 번째 측면은 은행의 권한과 주주 권리를 확대하는 조치가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은행들이 새로운 사업 영역에 진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존 고객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축소나 구조조정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카시야프는 1980년대에 들어 은행들이 넘쳐나는 예금을 운용할 대상을 적극적으로 물색하기 시작하면서 규제 변화들 사이의 상충되는 요소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지출 확대로 국채 발행이 늘어난 것이 채권시장의 발전에 자극제가 되었다. 지속적인 재정 적자로 인해 국채 발행이 불가피해진 1980년대 초 일본 정부는 국채 발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채권시장에 대한 규제를 대대적으로 완화했다.
채권시장에 대한 규제 완화는 대기업들이 자기신용을 기반으로 회사채를 발행해 장기 자금을 확보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이들 기업들이 투자 자금의 상당 부분을 내부 유보에서 충당하게 되면서 외부 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감소했다.
1980년대 하반기 일본 금융시장의 핵심 특징으로 금융규제 완화에 따라 대기업들이 직접금융시장으로부터 자금을 대폭 조달하기 시작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주식 및 주식연계채권, 기업어음(CP), 무보증 회사채, 해외채권 등의 발행이 증가한 결과였다. 주식시장 호황에 따라 대기업들은 주식, 전환사채(Convertible Bond, CB), 신주인수권부 사채(Bond with Warrant, BW), 주가와 연동된 해외채권 등의 발행을 통해 자금을 매우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금융규제가 점진적으로 완화되면서 대기업들은 규제 차이를 이용한 차익거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들은 설비투자에 필요한 자금보다 더 많은 자금을 저비용으로 조달해 수익률이 높은 양도성 예금증서(CD), 외화예금, 주가 상승으로 수익이 늘어나는 특별 금전신탁이나 신탁 등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며 금융 차익거래에 참여했다.
기업들은 여전히 금리규제가 적용되는 금융상품을 통해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한 뒤 금리 자유화로 시장금리에 연동되는 은행 예금이나 신탁계정에 자금을 운용함으로써 금리 차익을 얻었다.
이와 같은 금융 차익거래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기업들이 규제금리가 적용되는 기업어음(CP)을 발행해 조달한 자금을 시장금리에 연동되는 고액 예금에 예치하여 금리 차익을 실현한 방식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대기업들은 모든 자산들 중에서 장기적으로 가장 수익률이 높았던 토지 등 부동산에 대한 투자도 크게 늘렸다. 대기업들의 부동산과 주식의 투자 증가는 이들 시장의 가격 상승을 더욱 부추기면서 결과적으로 버블 형성에 기여했다.
대기업의 은행대출 축소 추이는 일본 경제의 성장률이 둔화되기 시작하면서 외부자금에 대한 수요가 둔화되기 시작한 1970년대 초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금융자유화 이후에는 대기업들은 직접금융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으로 은행 대출을 줄여 나감에 따라 은행들은 최고의 고객을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대기업들의 장기 은행대출 수요의 감소는 일본장기신용은행, 일본흥업은행, 일본채권신용은행 등 3개의 장기신용은행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미치게 되었다.
금융자유화에 따른 자금조달비용의 상승과 대기업의 장기대출 수요의 감소로 인한 충격이 컸던 이들 장기신용은행들은 높은 조달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새로운 고객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들은 예금을 취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소기업을 고객으로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대신 이들은 지분을 100% 보유한 자회사를 통해서 부동산업에 대한 대출을 늘리거나 특히 1980~90년대 버블기에 부동산 및 건설업체에 대한 고위험 대출이 크게 늘렸다. 은행대출에 대한 대기업들의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메인뱅크 중심의 기존 금융 관행도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다.
우량 대기업들이 은행을 통한 자금 조달에 적극 나서지 않던 시기에 금리 규제는 점진적으로 완화됨에 따라 가계가 선택할 수 있는 저축 수단은 여전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가계 저축 대부분이 은행 예금으로 유입되었다.
그 결과 대출이 가능한 자금은 빠르게 증가한 반면 대출 수요는 위축되었다. 이는 대출 금리 하락압력 증대로 이어져 예금과 대출의 금리 차인 순이자 마진(Net Interest Margin)이 축소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순이자 마진이 축소되고 우량 대기업 고객들이 이탈하자 대형은행들은 기존의 영업 방식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비교적 규모가 작고 신용도가 낮은 국내 기업들을 대상으로 가치 평가가 용이하다고 여겨졌던 토지 등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확대하는 전략을 모색했다. 그 결과 은행들은 부동산 담보를 앞세워 신용도가 비교적 낮은 대출자들에게 자금을 공급하는 데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은 차입자에 대한 대출 확대와 함께 은행들이 더 높은 위험을 감수하도록 유도하는 인센티브로 작용했다.
IMF의 스티븐 프라이스(Stephen Fries)는 통계적 분석을 통해 일본의 금융자유화로 인해 은행들의 시장지배력이 약화된 것이 은행들의 위험 선호 성향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입증했다.
은행들이 대출 포트폴리오를 확대한 부문은 (1) 부동산 담보를 가진 소기업, (2) 부동산업과 부동산 관련 기업, (3) 주택금융을 전담하는 주센 등과 같은 비은행 금융기관, (4) 개인 대출 등 4개 부문이었다. 1980년대 초에는 은행들의 총대출 중 제조업에 대한 대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30%이었고 부동산 부문과 비은행 금융기관들에 대한 대출은 10%에 불과했다.
1980년대 말에는 제조업에 대한 대출은 총대출의 15% 정도로 축소된 반면 부동산 부문과 비은행금융기관에 대한 대출 비중은 23%로 높아졌다. 이러한 대출 패턴의 변화는 특히 신탁은행들과 장기신용은행들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울러 1989 회계연도 말 기준으로 소기업 및 개인에 대한 대출이 전체 은행 대출 잔액의 66%를 차지하며 이들이 주요 고객층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대출 확대는 순이자 마진 감소의 충격을 완화하고 그 하락을 억제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은행들은 이러한 신규 대출 고객들이 대기업에 비해 신용도가 떨어진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한 은행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소기업 및 개인 차입자의 신용리스크에 상응하는 금리 프리미엄을 충분히 반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신용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부동산 담보 대출을 확대해 나갔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은행들은 토지 등 부동산의 시가 대비 60~70%를 넘지 않는 수준에서 대출 한도를 설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는 지가 상승에 대한 기대가 확산되면서 토지 시가의 100%까지 대출해 주는 사례가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은행들이 담보 위주의 대출 관행에 의존한 결과 대출 포트폴리오의 리스크 분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는 대출의 상당 부분이 부동산 담보에 치중됨으로써 산업별로 차입자가 다양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위험이 부동산이라는 단일 자산군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토지와 주식 등 자산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은 부동산을 보유한 중소기업과 개인, 부동산 업체 및 부동산 관련 대출 비중이 높은 비은행 금융기관의 신용도가 향상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부동산 담보 대출이 널리 확산됨에 따라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부동산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고 부동산 담보 대출이 보편화됨에 따라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부동산 담보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부동산 수요를 증가시켜 가격 상승을 한층 더 부추겼다.
이처럼 금융기관들이 공격적으로 영업을 확장함에 따라 대출을 포함한 신용이 과도하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도한 신용 확대는 당시 비교적 건전하다고 평가된 거시경제 펀더멘털 뿐만 아니라 금융환경 변화에 대한 금융기관들의 성급한 대응 방식까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금융기관의 수익성은 이미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고 향후 더욱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 결과 금융자유화 이후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한 은행 간 경쟁 심화, 이에 따른 고위험 영업 확대, 부동산 및 가계대출의 급증과 이에 따른 부동산 가격 상승 가속화, 낮은 조달비용을 활용한 대기업의 금융 차익거래 및 재테크 확산, 그리고 부동산 중심의 담보 대출 관행의 심화 등이 자산 버블 형성의 기반을 조성하게 되었다.
두 번째 변위로는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가 급격히 강세를 보였고 일본은행은 이에 대응해 통화정책을 대폭 완화함으로써 자산가격 상승을 촉발하는 중요한 배경을 제공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모인 주요 5개국(G5/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재무장관.
1985년 9월 22일 플라자 합의 이후 엔/달러 환율은 244엔에서 1986년 8월에는 153엔까지 급락하며 엔화가 급격한 강세를 보였다.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엔화는 미 달러화 대비 약 60% 가까이 절상되었다.
이처럼 빠른 엔화 강세는 수출 중심의 일본 경제에 타격을 주어 경기 둔화로 이어졌다. 이 같은 외부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일본은행은 적극적인 통화 완화 조치를 통해 내수 확대와 수출 산업에 대한 지원에 나섰다.
일본은행은 1986년 당시 기준금리에 해당하는 공정 할인율(Official Discount Rate)을 네 차례 인하하여 5.0%에서 3.0%까지 낮추면서 통화 완화 기조를 대폭 강화했다.
이어서 루브르 합의가 체결된 1987년 2월 22일 일본 정부는 더 이상의 엔고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경상수지 흑자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내수 확대를 위한 통화·재정 정책의 시행에 동의했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일본은행은 이튿날 글로벌 정책 공조 차원에서 기준금리를 2.5%로 인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금리가 불과 1년 사이에 절반으로 하락하면서 시중 유동성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일부에서는 인플레이션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와는 달리 넘치는 유동성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고 자산시장으로 유입되어 주식과 부동산 가격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이러한 자산 버블의 발생과 팽창이 전적으로 통화정책의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장기간 지속된 완화적 통화 기조가 일정 부분 이를 부추긴 측면이 있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현재 간사이대학에 있는 지누시 도시키 등 3명의 일본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1986년 봄부터 높은 통화증가율에 대한 경고를 표명했다고 한다. 1986년 4월자 일본은행 조사통계월보에서는 통화 유통속도의 누적적인 하락 폭이 과거의 통화 완화기보다 크다고 지적하며 확대된 통화 공급이 토지 거래에서 투기적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통화 팽창과 자산시장 과열을 억제하기 위한 긴축적 통화정책의 전환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이를 시행하지 않을 경우 인플레이션 위험이 증대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는 1980년대 후반 일본의 경우 엔화 강세와 유가 하락 등의 외부 요인 덕분에 물가 상승압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긴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