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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이 10Km 지점에서 영국 선수 어니스트 하퍼를 앞지르자 하퍼가 “슬로우 슬로우”를 외치며 손기정의 오버페이스를 염려해주었다. 줄곧 선두를 달리던 자발라는 30Km 지점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쓰러지면서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손기정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40Km지점의 비스마르크 언덕을 넘어서자 적십자마크를 단 간호사가 그를 반기며 차가운 물을 건넸다. 남은 2Km는 완만한 내리막길이었다. 손기정은 올림픽 스타디움에 운집한10만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전력을 다해 마지막 트랙을 나는 듯이 달려 결승테이프를 가슴에 걸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서 스파리돈 루이스가 40Km를 2시간 58분 50초로 달려 우승한 이후 그동안 누구도 2시간 30분대의 벽을 넘지 못했다. 손기정이 그것을 최초로 돌파한 것이다. 2위는 경쟁자인 손기정이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도록 배려해준 하퍼, 남승룡은 하퍼보다 19초 뒤진 3위로 들어왔다. 참가선수 중 가장 나이 많은 하퍼는 원래 장애물경주선수로 마라톤대회에 처음 출전하여 2위를 차지하였고 부상으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손기정처럼 힘이 넘치는 선수는 없을 것이라고 칭찬했다. 하퍼는 그 후에 손기정이 이끄는 선수단이 런던올림픽에 참여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손기정은 의도적으로 일장기가 붙어있는 선수단복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입고 다니지 않아 경고를 받기도 했으며 사인을 요청하면 한글로 사인하면서 KOREA를 함께 표기했다. 시상식에서는 옷에 부착된 일장기를 꽃다발로 가렸는데 3위로 시상대에 오른 남승룡도 일장기를 가리고 싶었는데 꽃다발을 가진 손기정이 무척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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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을 옮겨 다니며 잠자리는 마련했으나 배고픔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허기가 져서 제대로 달릴 수 앖었던 손기정은 체육담당교사인 김수기 선생을 찾아갔다. 김수기 선생도 일본에서 고학을 했으니 그의 배고픔을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손기정은 다짜고짜 ‘형님, 배가고파 못 뛰겠습니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매월 5전만 주십시오”하고 졸랐다. 김수기 선생은 박봉을 쪼개어 5전이 아닌 매월 2원을 손기정의 특별급식비로 내놓았고 손기정은 당시 한그릇에 10전 이던 설렁탕을 매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그 이후 김수기 선생은 손기정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손기정은 부모가 생명을 주었다면 김수기 선생은 그를 방황하지 않고 바른길로 인도하여 마라토너로 길러준 분이라 회상한다. 김수기 선생은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후 감사의 선물로 넥타이를 사다드린지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다.
손기정은 1933년 10월에 열린 조선신궁경기대회 마라톤대회에 첫 출전하여 2시간 29분 34초 4, 이듬 해에는 2시간 24분 51초 2의 비공인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하며 완전한 마라토너로서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 일본 후보 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로 1위에 오르자 동아일보 등 민족신문들이 대서특필하여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는 조선인들의 희망이 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며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지만 도리어 조선인들의 동요를 우려한 총독부의 요주의 인물이 되어 귀국 후에는 제대로된 환영식조차 열리지 못했다.
마침 베를린올림픽에 같이 출전했던 미국 선수 존 켈리(John Kelly)로부터 연락이 왔다. 존 켈리는 당시 우승자인 손기정의 마라톤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 신발을 얻어갔다. 그리고 그가 준 운동화의 신통력으로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기쁨과 감사의 뜻을 적은 엽서였다.
손기정의 선배인 남승룡도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출전했다. 서윤복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서윤복은 28Km지점에서 갑자기 개가 뛰어들어 훼방을 놓는 바람에 페이스를 놓치고 선두를 쫓아가면서 32Km지점에서 마의 고개 하트브레이크 힐 (Heart break Hill)을 만났다. 평소 정릉골짜기에서 삼청공원으로 북악꼭대기를 뛰어오르며 체력을 길러온 서윤복은 모두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마의 고개 중반에서 선두로 나섰지만 이번에는38Km지점에서 운동화끈이 풀어지기 시작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서윤복은 꾀를 내어 관중이 들고 있는 물통을 신발에 부어 물에 젖은 끈이 다시 풀어지지 않게하며 마침내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을 했다. 손기정은 당당히 태극기를 앞에 달고 우승한 서윤복이 그렇게 부러웠다.
이창훈은 그 이후 각종 국제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며 한동안 침체에 빠진 한국마라톤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이창훈은 1963년 1월 20일 손기정의 사위가 되었다. 손기정의 집에서 3년간 숙식을 하면서 중앙대 동문인 손기정의 딸 문명과 쉽게 친해 진듯했다.
손기정은 꿈에 그리던 태극기가 달린 옷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성화봉송 마지막주자로 달렸다.
윤형돈 운을 부르는 인맥관리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