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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의 미술事色⑨] 그림팔고 싶어요

박정수 정수아트센터관장

기사입력 : 2020-03-1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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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막론하고 미술계는 그림을 팔아야 돈을 산다. 돈을 사야 물감도 사고 밥도 사먹을 수 있다. 누군가 팔리는 그림을 잘 그리는 이가 있다면 그의 제자가 되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이든 팔수 있고 팔릴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림을 팔고 싶은 이는 화가뿐만 아니라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이도 그러하다. 화랑도 그림 못 팔아 환장한다. 개인전 한번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전시장을 대관하면 더 큰 출혈이 발생한다. 설령 초대전을 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소요되는 물감 값 등을 차지하더라도 액자에 운송비에, 오픈날 행사 등에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화가를 초대한 화랑 또한 만만치 않다. 자기건물에서 화랑을 한다면 모를까(건물주면 화랑보다 다른 일 하겠다.) 월 임대료에 초대전 행사비용과 인건비를 포함하면 만만한 비용이 아니다.

거액을 주고 산 구매자도 마찬가지다. 팔 곳이 없다. 인사치례로 그림을 구입하였지만 백만원 이백만원이 넘어가면 본전생각 난다. 구입한 작품의 화가가 빨리 유명해지면 좋겠는데 참 더디 유명해진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개인전을 했다거나 상을 받았다는 등의 뉴스는 확인되고, 페이스북에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도대체 얼마짜리인지도 알 수가 없다. 경매회사에 공개되어 있는 작품들은 이미 유명하거나 돈 되는(?) 작품들이라 알려져 있다. 화가 이름정도는 알고 있지만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십년 전인가 구입한 작품입니다. 아는 화가이기도 했지만 국전 입상작라고 해서 오르겠지 하는 심정으로 샀어요. 한 십년 지났으니까 가격이 얼마라도 올랐으면 팔고 싶어요. 화랑에 가격을 물어 보았더니 그 작가의 작품은 취급하지 않는다 하더군요. 다른 화랑에 전화해 봐도 마찬가지구요. 몇 군데 화랑에 전화했죠. 가격이 제각각입디다. 저 같은 사람들이야 그림 값을 알 수 있나요. 이곳저곳 전화해서 제일 비싼 곳에 팔면 되는 거죠.”

팔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사겠다는 사람이 부족하다. 팔고자하는 사람은 비싸건 싸건 파릴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데 정해진 값이 없다. 비교대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는 그림이 팔리고 누군가는 그림을 산다. 어떤 그림이기에 팔리고 사고 하는 것인가? 팔리는 그림은 어떤 것인가? 모를 일이다.

난센스 한 질문이 있다. 예술작품은 예쁜 것이 잘 팔릴까 낯선 것이 잘 팔릴까?
이런 질문에는 예쁜 것은 무엇이고 낯선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소위 말하는 예쁜 것이란 과거의 경험과 기록에 의해 눈에 익숙한 상태에서 다양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짐승이나 꽃이 사람의 손에 의해 보기 좋음으로 진화 되었듯이 모양이나 행동이 사회적 조건에 아주 잘 부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예쁜 것이 잘 팔린다면 새로운 것을 처음 만드는 ‘창작(創作)’이라는 것에 힘을 쓰는 이가 거의 사라질 지도 모른다. 처음 본 것은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예쁘다의 대응 개념으로서 추(醜)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보기 싫거나 못생겼음을 의미한다. 예쁘거나 보기 좋은 것은 그림으로 그릴 수 있으나 추(醜)함을 이미지화 시키는 일은 어렵다.

보편성과 일반적 미의 영역에 공존하는 미(美)의 대응 개념으로서 추(醜)가 형성된다. 미추(美醜)는 닭이냐 계란이냐의 것이 아니라 정반합(正反合)의 관계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추(醜)는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고 일반적 개념으로 정당화 시킬 수도 없다.
‘미(美)’와 ‘추(醜)’는 이음동의어(異音同意語) 일 수 있다. 미가 없으면 추를 이해할 수 없고, 추가 없으면 미의 영역이 생성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미(美)가 추(醜)가 되기도 하고 추(醜)가 미(美)의 영역을 장악하기도 한다. 그러면 예쁜 것과 낯선 것의 상관성은 어떠할까?

어릴 적 소풍을 가거나 산을 오를 때면 어른들이 꼭 당부하는 말이 있었다. ‘색이 선명하고 예뻐 보이는 버섯은 독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독이 있을 가능성’과 ‘예뻐 보이는’것의 상관관계에 주목하자.

태국의 소수민족 중에 목에 링을 채워 목을 길어야 예쁨으로 인정받는 카렌족이 있다. 짐승으로부터 목을 보호한다거나 외부의 침입으로 여성을 보호한다거나 중국의 전족과 같이 거동을 불편하게 한다는 등의 속설이 있다. 이 무엇이든 종족보호라는 명분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어느 부족은 아랫입술을 찢어 접시모양의 판을 끼우고, 뚱뚱함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부족도 있다.

미술품도 그럴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예쁜 것이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어느 곳에서는 보편적 미의 기준에 들지만 다른 어딘가에서는 특별하거나 특수한 모양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잘 팔리는 미술품은 특별한 무엇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예쁜데 처음 본 듯하고, 처음 보았는데 어디선가 봄직한 이미지가 주목 받기 쉽다. 가격이 비싸지고 사회에서 관심과 조목을 받는 그림들은 미추(美醜)의 영역이 혼재되거나 대응의 상태를 인정하는 작품들이 많다. 그래서 예술은 부정이 아니라 다름의 영역이다.

밀레가 사회의 불평등이나 노인의 고단한 삶을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 눈에 들어오는 보통 사람들을 그렸다. 수탈과 착취에 대한 사회성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화폭에 옮겼다.

[박정수의 미술事色⑨] 그림팔고 싶어요
마음의 모양 Shape of Heart _이재순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과 화가 이재순이 바라보는 세상은 다르지 않다. 같은 곳 비슷한 곳을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방법과 느낌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대상이라고 하였다. 기둥이 있고 가지가 있고 무성한 이파리가 있는 나무처럼 닮은 또 다른 생명이다. 나무처럼 생긴 생명체는 심장의 박동을 매개로 마음에서 자라 나무라고 하면 나무가 되고, 마음의 소리라고 하면 소리가 모양으로 변한 그림이 된다.

마음에서 자라는 생각을 보여주기 위해 색과 모양을 절제한다. 나무를 닮은 모양은 살아있음을 알게 해 주는 생명의 자리를 찾아가는 방법으로 선택된 대상이다. 갈등과 화해, 지난한 삶의 아픔, 오늘을 있게 한 어제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

▲(좌)이재순 Shape of Heart Mixed media on canvas  2016, (우)이재순 Shape of Heart Mixed media on canvas 2016_2

▲(좌)이재순 Shape of Heart Mixed media on canvas 2016, (우)이재순 Shape of Heart Mixed media on canvas 2016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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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작품들은 대다수 밑둥치와 뿌리가 그려져 있지 않다. 나무의 어느 한부분이 화면을 장악한다. 가지가 그려지고 배경은 비어있으며 황토색 단색으로 칠해진 부분에는 무한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흡수되고 마는 블렉홀과도 같은 공간이다. 거기에서 나뭇가지가 자란다. 소음과 소란과 웅성거림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조용히 담아낸다. 알아듣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재순 Shape of Heart 116.8×50.0 Mixed media on canvas  2020

▲이재순 Shape of Heart 116.8×50.0 Mixed media on canva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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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순 Shape of Heart 116.8×50.0 Mixed media on canvas  2020 2

▲이재순 Shape of Heart 116.8×50.0 Mixed media on canvas 202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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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관망하기 시작한다. 마음과 생각을 만들어 내다가 스스로를 바라보며 절제하는 시간이된다. 나무모양을 그리다가 숲이 그려지는 시기다.

▲이재순 Shape of Heart 72.7×60.6Mixed media on canvas  2020

▲이재순 Shape of Heart 72.7×60.6Mixed media on canvas 2020


넓은 세상에서 촘촘히 엮여있는 나무를 본다. 나무이거나 이파리 이거나 이제는 더 이상 구분 될 이유가 없다. 숲이거나 한 개의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몇 가닥의 이파리는 같은 세상이다. 새벽녘에 내린 촉촉한 이슬이 마음에 자라는 나무들의 생명이 되기도 한다. 이파리 사이사이로 보이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빛이 들어 볕이 되고, 볕은 색으로 변하여 그림에 자리한다. 어디에나 있어, 너무나 흔하여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마음의 이야기가 하나의 가지에서 맺어진다.

▲(좌)이재순 Shape of Heart 60.6x60.6 Mixed media on canvas  2019 2, (우)이재순 Shape of Heart 60.6x60.6 Mixed media on canvas  2019 3

▲(좌)이재순 Shape of Heart 60.6x60.6 Mixed media on canvas 2019 2, (우)이재순 Shape of Heart 60.6x60.6 Mixed media on canvas 20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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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이파리이거나 한그루의 나무이거나 세상을 뒤덮을 수 있는 숲은 하나의 소리가 된다. 마음의 소리며 심장의 모양이다.



박정수 정수아트센터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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