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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칼럼) 강남 讚歌 (상)

장태민

기사입력 : 2018-11-21 10:17 최종수정 : 2018-11-21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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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서울 선릉역 일대

사진=서울 선릉역 일대

[한국금융신문 장태민 기자]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이 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밤이 새면은 첫차를 타고

이름 모를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

가수 혜은이가 부른 이 노래는 가사 때문에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불운을 겪었다. 검열 당국은 ‘처음 만나 사랑을 하고 하나가 된다’는 노랫말의 부도덕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후 이 노래의 ‘타락한 가사’는 수정을 거친 뒤 대중들에게 공개돼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 강남은 어떻게 시골에서 도시가 됐나

가수 혜은이가 부른 ‘제3한강교’는 화려하게 변신한 ‘강남’을 상징하는 노래였다. ‘원조 요정’ 혜은이의 멋드러진 제3한강교 예찬에도 불구하고 다리 이름은 1985년 한남대교로 바뀌었다.

제3한강교는 1966년 1월 공사를 시작해 1969년 12월 길이 915미터, 폭 27미터의 다리로 준공됐다. 당시 건설 중인 경부고속도로(1970년 7월 개통)와 맞물려 이 다리는 강남 시대를 여는 상징물이 될 예정이었다. 혜은이는 다리 완공 10년 후 시대를 대표하는 히트곡을 강남에 헌정했고 그 사이 땅값은 뛰었다. 제3한강교 착공 당시 강남구 신사동 일대 땅값은 평당 200원이었으나 1년 만에 땅값은 3천원으로 15배 급등했다.

강남. 아무나 살 수 없다. 대형 평수의 아파트와 명문 학원, 쇼핑가, 유명 기업 본사가 터를 잡은 강남은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다. 하지만 1963년 이전까지 ‘강남’은 서울에도 속하지 못한 시골이었다.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한 땅이었으며, 소달구지가 지나다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원래 강남은 ‘영등포’였다. 과거 한강 이남에서 개발된 곳은 영등포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강남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 지금의 강남을 뜻하는 명칭은 ‘영동’(永東), 즉 영등포의 동쪽이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이 지역 개발 계획의 정식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1960년대 서울은 포화상태에 달했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정부는 무엇보다 ‘안보문제’ 때문에 고심을 하게 된다. 한국전쟁의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은 당시 서울 시민이 ‘유사시’ 한강을 건널 수 있게 해야 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넘쳐나는 서울의 ‘인구 분산’과 ‘피난 대비’ 차원에서 강남 개발을 결정했다. 소설가 이호철이 1965년 ‘서울은 만원이다’를 신문에 연재했을 때 서울 사대문 안의 인구만 350만에 달했다. 지금의 부산 전체 인구와 맞먹었다.

제3한강교를 통해 서울에서 ‘시골’로 가는 길이 열리고 고속도로도 닦이면서 강남은 부흥의 씨앗을 틔웠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독일에서 본 아우토반에서 영감을 받아 1968년 2월 착공식을 연 뒤 1970년 7월 전 구간을 개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상하기 힘든 속도전이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계획은 소련 스탈린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서 그 영감을 얻은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와 제3한강교가 완성되면서 강남은 좀 더 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1972년 양택식 서울시장은 “사치, 낭비 풍조를 막고 도시 인구 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종로 등 시내에 있는 캬바레, 나이트클럽의 신규 허가와 이전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서울(강북) 전지역에 ‘유흥시설 억제책’을 적용했다. 이에 따라 각종 술집들은 신사, 압구정, 논현동 등 시골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여기서 ‘룸살롱’ 장사가 시작됐으며, 1970년대 호스티스 문화가 꽃을 피웠다.

소설가 최인호는 이 시대 강남 호스티스의 삶을 ‘별들의 고향’을 통해 그려냈다. 소설의 주인공 경아는 그 시절 술집 접대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름이 됐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뒤 웨이터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름이 박찬호가 됐지만, 경아의 인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고 한다.

1982년 통행금지 해제와 함께 강남의 유흥문제는 한 단계 더 발전했다. 강북의 서울 시민들이 도시정화를 위해 펼친 정책은 결국 강남의 유흥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엔 생존의 길을 모색하던 강남의 술집들이 ‘북창동식 문화’를 전격 도입하면서 한층 더 농염해진 퇴폐 문화를 선보이며 사업의 활로를 찾기도 했다. 대신 ‘타락한 해방구’였던 북창동은 2000년대 들어 그 명성을 빠르게 잃어버렸다.

1970년대 후반 상공부 산하 12개 공기업 청사의 건립 계획이 확정되면서 영동(강남) 개발 부지 면적은 937만평으로 확대된다. 서울 사대문 안의 면적이 500만평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강남 개발 프로젝트는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당시 강남의 땅값은 ‘서울’에 비하면 공짜나 다름없었다.

이후 이 넓은 시골은 10년에 걸친 공사 끝에 현대 도시로 탈바꿈했다. 서울과 가까운 광주군과 시흥군의 면(面), 리(里)는 지금의 강남을 이루는 뼈대가 됐다. 배나무 과수원골이었던 압구정, 도라지 특산지였던 도곡, 물 맑은 청숫골이었던 청담, 꽃동네였던 서초, 뽕밭이었던 잠원 등에 살았던 시골 사람들은 서울(강북) 사람들을 상전 모시듯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사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이 지역엔 집 전화는커녕 공중전화도 거의 없었다.

강남 개발이 닻을 올린 뒤 1978년 11월에야 제대로 된 고속버스터미널 공사가 시작됐으며, 1981년 10월 경부선 터미널이 완공됐다. 경부선터미널은 11층이나 되는 ‘고층’ 건물이었으며, ‘무려’ 4층까지 버스가 올라가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고속버스와 시외버스가 모두 이 터미널을 이용하면서 엄청난 교통 혼잡이 일었다. 서울시는 동남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남부터미널을 만들어 시외버스터미널을 분리했다.

경부고속도로와 제3한강교(한남대교), 그리고 고속터미널이 완공되면서 본격적인 강남 시대가 막을 올렸다. 이 도로와 교각 위로 자동차가 달리면서 강남도 달리기 시작했다.

▲ 아파트 천국 강남

과거 한강은 강남과 서울에 중대한 위협이었다. 특히 강남은 지대가 낮아 자주 물에 잠겼고 강남 시골 사람들은 마누라나 서방은 없어도 장화는 있어야 했다. 한강 폭은 최대 2킬로까지 넓어졌다가 갈수기엔 50미터 가까이까지 쪼그라드는 등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변신을 거듭했다.

제방을 쌓아야 했다. 아니, 그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한강의 수위 조절이었다. 소양강댐이 1973년 완공되면서 서울은 장마철 한강 범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방과 도로건설과 함께 이뤄진 중대한 사업이 있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던 공유수면(국가나 공공단체가 소유한 강, 바다 등의 수면) 매립을 통한 택지 조성이었다.

이 시기를 주도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왕 회장 정주영이었다. 정주영은 1969년 2월 압구정 일대에 대한 매립 면허를 따냈다. 그는 저자도(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만나 형성된 작은 섬)의 모래를 파내 강변에 쌓았다. 매립 면적은 당초 허가된 면적보다 20퍼센트나 더 넓어 원상복구 명령을 받기도 했다. 여러 입방아가 나도는 가운데 제방공사와 매립공사는 1972년 12월에 마무리됐다.

당초 현대건설은 ‘콘크리트 제품 공장 건설을 위한 대지 조성’을 명목으로 매립을 시작했으나 매립지는 곧바로 택지로 변경돼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바뀌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는 아파트에 회사 이름을 붙인 첫 번째 사례가 됐다.

조선시대의 권신 한명회가 정자를 지어 호사를 즐기던 이곳은 이후 한국의 부를 상징하는 곳으로 성장해갔다. 압구정동과 인근 부유층의 자제들은 1990년대 ‘압구정 오렌지족’이란 이름으로 맹위를 떨치기도 했다. 1990년대 압구정 오렌지들의 위세는 엄청났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50대를 바라보는 점잖은 직장인이 됐다.

아무튼 당시 공유수면 매립 공사는 봉이 김선달도 울고 갈 남는 장사였다는 말들이 돌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강변은 아파트의 숲으로 변해갔으며, 현대는 더욱 성장했다. 현대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 개발로 번 돈으로 자동차, 조선 등 국가 기간산업을 일으켰다. 정주영이 압구정 신화의 주역이 된 뒤 이후 롯데의 신격호닫기신격호기사 모아보기는 잠실 신화의 기린아가 된다.

개발시대에 쉽게 돈을 벌던 관행은 지금도 남아 있다. 용적률을 높여 기존 아파트 단지를 재개발하거나 재건축해서 쉽게 이익을 벌던 방식은 아직도 ‘경제활동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초과이익은 제대로 환수되지 않고 소수에게 돌아갔으며, 서민이라는 이름의 가난한 사람들은 꿈을 접어야 했다. 불로소득은 경제활동의 ‘자유’라는 이름 하에 그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1970년대 중동 특수는 강남 부흥에 날개를 달아 줬다. 1977년 6월 테헤란 시장의 서울 방문을 계기로 강남의 가장 중요한 도로에 테헤란로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중동에서 돈이 들어오자 제3한강교 건설 이후 ‘서울’과 강남을 잇는 많은 다리들이 생겨났다. 트로트의 여왕 가수 주현미는 ‘비 내리는 영동교’를 통해 강남 전성시대의 도래를 노래했다.

강남에 최초로 들어선 아파트는 1971년 4월 착공해 같은 해 12월에 완공한 논현동 22번지 공무원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는 서울시 공무원 중 무주택자에게 헐값에 분양됐다. 하지만 주위가 너무 황량해서 상당수는 다시 서울(강북)로 돌아갔다. 하지만 서울시장 양택식은 1972년 ‘영동 지구 주택건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압구정동, 학동, 논현동, 청담동 일대에 더 많은 아파트를 짓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양택식은 대한주택공사 사장으로 변신했다.

1975년 10월 영등포구와 성동구에서 큰 덩어리의 땅이 떨어져 나와 강남구가 태어났다. 당시 강남구는 지금의 강남구뿐만 아니라 서초구, 송파구, 그리고 강동구를 포함하는 초대형 구(區)였다. 때 마침 월남이 패망하면서 한국사회에선 ‘유사시 한강을 건너는 문제’가 다시 뜨거운 이슈가 됐다. 월남 패망은 강남의 주가를 더욱 띄웠다.

1976년 8월 건설부는 11개 아파트 지구를 고시하면서 강남 중심의 ‘아파트 시대’를 선언했다. 11개 지구 가운데 절반이 넘는 6개가 강남에 있었다. 반포지구 167만평, 잠실지구 74.5만평, 압구정지구 36만평, 도곡지구 22만평, 청담지수 11만평, 이수지구 2.5만평이었다. 범강남권이라고 볼 수 있었던 여의도지구는 17만평이었다. 과거 ‘너나 가지라’(汝矣島) 혹은 ‘아무나 가지라’는 이름처럼 별 볼 일 없던 여의도도 강남에 준하는 위상을 갖추게 됐다. 아파트 지구 내에 땅을 가진 지주들은 사유재산을 침해당하면서 ‘업자’들에게 땅을 팔아야 했다.

아파트 건설업체들은 1970년대 중반부터 10년 넘게 땅 짚고 헤엄치기 수법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건축허가를 받은 뒤 입주자를 모집하고 그 계약금으로 기초공사를 한 뒤 분양계약서를 담보로 막대한 자금을 대출받았다. 아파트가 올라가면 매달 납부금이 들어오고 완공 후 입주가 시작되면 잔금이 들어왔다. 건설업체들은 이렇게 번 돈으로 다시 땅을 사고 아파트를 지었다. 1980년대 말까지는 그야 말로 건설업체 전성시대였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토지공개념이 도입되고 정부가 분양가 규제에 나선 가운데 땅값이 더 이상 오르지 않자 부채 경영을 하던 업체들의 상당수가 나자빠졌다.

강남의 성장은 교회의 세력 확대와도 관계가 깊었다. 은마아파트 상가에는 한 때 100개가 넘는 개척교회가 들어서기도 했다. 이 같은 강남의 개척교회 중 몇몇은 대형화에 성공했으며, 강남 교회들은 인맥을 쌓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됐다. 강남 교회의 성장과 함께 김영삼, 이명박과 같은 장로 출신 대통령이 탄생하기도 했다. 물론 같은 교회를 다닌 형, 동생이 서로 밀어주고 당겨줬다.

강남의 성장 스토리에서 학교도 빼 놓을 수 없다. 명문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은 강남의 이미지를 드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사실 명문고의 강남 이전엔 사대문 등 서울 시내의 교통난 해소라는 목적 외에 귀찮은 학생들을 멀리 보내버리려는 정권의 속셈도 작용했다.

학생들의 ‘데모’에 골치를 앓아왔던 정부는 서울대학교를 관악산 기슭에 처박아 버리고, 종로와 중구에 몰려 있던 명문 고등학교들을 ‘외지’인 강남으로 보냈다. 그 때 고등학생은 지금의 대학생보다 더 사회문제 의식이 대단한 데모꾼들이었다. 당시 명문고 출신의 권력자들은 학교의 시골(강남) 이전에 크게 반대하기도 했지만, 절대 권력자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던 시대였다.

1974년 고교 평준화와 함께 ‘학군제’가 실시됐고 1978년엔 학군수가 9개로 늘어났다. 이 해에 강남에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강남구와 서초구는 그 유명한 ‘8학군’의 핵심이 됐다.

한국의 비이성적인 교육 열기는 강남 아파트 가격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1989년 사교육 억제정책이 풀리면서 1990년 초부터 대치동이 학원의 메카로 성장했다. 점점 돈과 학력의 되물림이 일상화됐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강남의 상위권 대학 점령이 시작됐다. 1997년 말에 터진 IMF 외환위기는 한국의 ‘출산율 저하와 양극화’의 원년이다. IMF 위기를 극복한 한국인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목소리 반대 쪽엔 여전히 ‘희망 없는 시대의 시작’이란 딱지를 붙이는 사람도 많다.

2001년 서울대 정시모집 1103명 중 강남구가 239명으로 20%를 넘기기 시작했고 서초구가 152명, 송파구가 89명을 차지해 기초자치단체 순위 1~3위를 휩쓸었다. 지금은 각종 수시모집이 더욱 활성화 돼 ‘부모가 돈만 있으면’ 공부를 아주 잘하지 못해도 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다. 기득권은 부와 학력의 되물림을 견고히 하기 위해 각종 아이디어를 짜 내면서 ‘더 합리적인 제도’라고 사람들을 속였다. 이 같은 현상은 강남 부동산 가격을 더욱 띄우면서 한국의 계급제도를 공고화했다.

이런 상황을 예언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가수 윤수일이었다. 한 때 전국 최고의 명문이었던 울산 학성고등학교 출신 윤수일은 1982년 국민가요 ‘아파트’를 발표해 강남 아파트의 풍경을 노래했다. 윤수일은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야’ 그녀가 사는 강남아파트에 갈 수 있다고 읖조렸다.

윤수일의 아파트엔 ‘갈대숲’이라는 강남권 초기 개발시대의 풍경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라고 했고 누군가는 여의도 시범아파트라고 했다. 아무튼 윤수일은 그녀가 사는 강남 아파트는 평범한 청년이 범접하기 힘든 곳으로 묘사했다. 그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계속)

장태민 기자 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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