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탄생한 타협의 산물이라며 탄식했다. 4월 총선쯤 ‘한국형 양적완화’ 도입 논의에서 시작된 자본확충펀드는 한국은행 발권력 동원 논란으로 번지더니 최근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추가경정 예산안에 국책은행 출자가 포함되면서 결국 ‘무용지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수 개월 간 소모적인 논쟁으로 시급한 기업 구조조정을 ‘제자리걸음’하게 만든 게 아니냐는 금융당국의 책임론도 제기되고 있다.
◇ 매듭의 시작 ‘한국형 양적완화’
시작은 4·13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3월 말이었다. 당시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 선대위원장이 총선 공약으로 ‘한국형 양적완화’를 내걸었다.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해소를 지원하기 위해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4월 초 새누리당은 20대 국회에서 ‘한국형 양적완화’를 법제화할 것을 공식화했다.
한국은행이 주택금융공사 주택담보대출증권(MBS)과 산업은행 채권을 직접 인수하도록 한은법을 개정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선거철 공약 정도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짙었다. 특히 총선 결과 ‘여소야대’로 재편되면서 여당의 ‘한국형 양적완화’ 추진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총선 이후 정부 여당뿐만 아니라 청와대에서도 ‘한국형 양적완화’에 대한 긍정적 검토 필요성이 제기됐고 분위기는 반전됐다. 금융위원회는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 부실채권이 늘어날 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의 자본건전성 악화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며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꺼내 들었다.
이때부터 자본확충 방안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쏟아져 나왔다.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는 자본확충 방안으로 정부의 현물(현금)출자와 한국은행 발권력 동원이 대표격으로 떠올랐다. 정부의 공기업 주식을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에 출자하는 방식은 국회 동의없이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가능하다. 한국은행이 금융통화위원회 의결을 거쳐 국책은행에 출자하거나, 국책은행이 발행하는 코코본드(특정사유 발생시 주식으로 전환되거나 상각되는 채권)를 매입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줄곧 정부는 한국은행에 직접 출자를 강조했고, 한국은행은 “구조조정은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라며 출자는 불가하다는 반대입장을 표했다.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산업은행, 수출입은행이 공동으로 논의하는 ‘국책은행 자본확충 협의체’는 회의 자체만으로도 관심 속에 열렸다.
그렇게 정부와 한은의 줄다리기 끝에 정부 출자를 중심으로 한은이 보완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가닥이 잡혔다. 정부는 지난 6월 8일 ‘제1차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한은의 대출(10조원)과 IBK기업은행의 대출(1조원)을 더해 총 11조원 규모의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특정 대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한국은행 발권력을 동원하는 게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왔고, 정치권에선 정부가 여소야대 국회의 예산심사를 피하기 위해 재정 대신 한은 발권력에 기댔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 출범 한 달 만에 ‘유명무실’ 논란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았던 자본확충펀드는 출범한 지 겨우 한 달 만에 기로에 서 있다. 최근 추가경정 예산안에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위한 출자 방안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정부 추경안에 따르면 국책은행에 1조4000억원의 현금출자가 이뤄질 예정이다. 수출입은행에 1조원, 산업은행에 4000억원이 지원될 예정이다.
수출입은행의 경우 1조원의 현물출자가 추가로 이뤄지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10% 수준에 도달할 전망이다. 산업은행의 BIS 비율도 15%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BIS 비율 제고를 위해 자본확충펀드 집행에 나설 만큼 국책은행이 급박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금 지원 요청이 올 때마다 지원하는 ‘캐피탈 콜(capital call)’ 방식도 자본확충펀드 제한 중 하나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1일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 지원 방향에 대해 “부실기업 지원 목적이 아니라 국책은행의 자본부족으로 인한 국민경제와 금융시스템 불안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캐피탈 콜’에 의한 실제 대출은 이러한 불안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실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책은행 채권 시장 수요가 이미 충분한 점도 자본확충펀드 실효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자본확충펀드 방안에 따르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코코본드를 발행하더라도 먼저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하는 제한이 있다. 시장 문을 먼저 두드리고 자본확충펀드에 기댈 수 있다는 것인데 현재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발행한 코코본드는 시장에서 충분히 소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장금리 이상의 대출금리가 적용된다는 점도 국책은행들이 자본확충펀드 활용을 머뭇거리게 할 요인이라는 지적이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1일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 지원 원칙으로 “도덕적 해이 방지를 위한 시장 실세금리 이상의 금리를 적용해 손실위험 최소화를 전제로 지원할 것”이라고 명시한 바 있다.
한은 대출금리에 신용보증기금 보증 수수료,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의 펀드 위탁관리 수수료 등 자본확충펀드 참여기관이 부담하는 각종 비용이 코코비용 발행금리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한 국책은행 관계자는 “정부 보전 조항이 있는 국책은행에 대해 이미 투자 수요가 있는 채권을 인수한다는 것부터 애초에 앞뒤가 맞지 않고 실효성이 의문시 됐다”며 “중간에 기관들이 복잡하게 관여하면 코스트(cost)가 증가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본확충펀드의 ‘무용지물’ 위기는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시중은행을 지원하기 위해 산업은행을 중간에 두고 시중은행의 신종자본증권과 후순위채 인수에 나섰던 은행자본확충펀드(은자펀드) 방식을 빌려온 것이다.
하지만 1차로 당시 우리은행(1조원), KB국민은행(1조원), 하나은행(4000억원), NH농협은행(7500억원) 등 8개 은행에 총 3조9650억원(연 4.42% 수준)을 지원한 은자펀드는 수요가 없어 사실상 용도 폐기됐다. 최초 대출한 지 5년 만인 2014년 3월에 최종 회수됐다.
한국은행 금통위 의결도 거치지 않은 채 정부가 미리(6월 8일)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 조성안을 발표했다는 논란도 빚어졌다. 한은 금통위는 지난달 1일 약속된 출범 예정일에 맞춰 임시회의를 개최하고 자본확충펀드 출범을 의결했다.
이와 관련 전날(6월 30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 한은 업무보고에서는 “최소한의 절차적 명분도 갖추지 못했다”는 여야 의원의 비판이 쏟아졌다. 이혜훈 새누리당 의원은 “금통위 의결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10조원이나 되는 대출 의결을 사후적으로 해봐야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도 “중앙은행의 총재와 구성원들이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를) 막았어야 했다”며 “절차를 보니 아마도 기획재정부나 금융위원회 압력 때문에 결론이 이렇게 난 것 같다”고 비판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은이 자본확충펀드로 발생할 수 있는 손실에 대해서는 금통위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도 자본확충펀드가 출범한 7월 1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는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며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정부에서 전부 출자한 은행인 만큼 모자라면 그만큼 출자하는 것이 낫다”고 꼬집었다. 특히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은 지난달 7일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에 투입되는 한국은행의 자금을 공적자금에 포함하는 방안을 골자로 하는 ‘공적자금관리 특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 추경으로 마침표? 다시 원점으로
추경예산 편성으로 가닥이 잡혔지만 여전히 과제는 남아있다. 구조조정에 대한 진단이 나오고 재원 마련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데 이미 순서부터 뒤죽박죽 되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달 26일 발간한 ‘2016년도 제1회 추가경정예산안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수출입은행(1조원)과 산업은행(4000억원)에 대한 출자금과 관련 “구조조정의 구체적인 방향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책은행의 자본금 예산을 편성하는 것은 정책의 순서가 올바르지 않다”는 의견이 나왔다. 보고서는 “구체적인 계획에 근거하지 않고 출자된 자금은 즉각적인 집행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다”며 “우선 정부가 구조조정의 방향을 명확히 밝힌 이후 이에 근거하여 필요 자금 규모를 산출하고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올바른 정책 순서”라고 지적했다.
실제 집행 가능성이 줄어든 자본확충펀드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폐기 수순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국회 기재위 소속 국민의당 박주현 의원은 지난달 27일 본회의 연설 때 “추경예산안 심의에서 국책은행 자본확충 펀드 폐기 의견을 명시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관계기관들은 자본확충펀드가 애초에 ‘예비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만큼 문제가 없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달 1일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를 의결했던 한은 금통위 의사록에 따르면, 금통위원들은 “국책은행 자본확충은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지만 금융안정 책무를 보유한 한은이 자본 부족에 따른 금융시장의 불안 가능성에 대비하는 ‘비상계획(컨틴전시 플랜)’ 차원에서 보완적·한시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라고 명확히 했다. ‘캐피탈콜’ 방식에 따라 건별로 필요 시 자본확충펀드를 집행하면 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를 두고 피할 수 있었던 논쟁이 수 개월간 이어졌다는 비판 속에 금융당국의 책임론도 제기된다. 진단에 따라 처방하는 정공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원인을 진단하고 필요하면 희생이 따르더라도 국책은행 구조조정 업무통합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며 ”책임을 지긴 지되 정부, 국책은행 등 각각 합당한 책임을 져야지 단순히 기관장 교체 등에 그치면 향후 발전을 모색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다른 금융업계 관계자도 “고도성장 시기에는 구조조정 과정 실패를 딛고 갈 수 있었지만 앞으로 저성장 시대에는 불가능한 얘기”라며 “자본확충펀드처럼 ‘궁여지책’ 방안을 만들 게 아니라 명확한 진단과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가 출범하기까지 〉
(자료 : 각 부처, 기관별 취합)
정선은 기자 bravebambi@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