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막상 해외 진출을 생각해 보면 갖가지 걱정이 앞선다. 말도 통하지 않고 연고도 없는 다른 나라에 나가 금융회사를 차리면 과연 손님이 있을까.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약점을 이용해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만 나타나지 않을까.
아시아 국가들만 하더라도 이미 세계적인 금융회사들이 모두 진출해 있는데 해외에서 그들과 경쟁을 해서 이익을 낼 수 있을까. 홈그라운드에서도 외국계 금융회사들에게 밀리고 있는데, 다른 나라에 나가면 더 밀리는 것 아닐까.
이런 걱정을 내비치면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고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일부 아는 사람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만 알고 있던 시절에 조잡한 시제품을 들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던 제조업체들에 비하면 지금 금융회사들은 형편이 훨씬 좋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삼성, LG, 현대의 나라 한국을 아는 사람들이 많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크게 개선돼 영업 여건이 훨씬 좋아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금융업은 제조업과 다른 핸디캡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자제품이야 물건만 좋으면 만든 사람의 피부색을 가릴 이유가 없다. 말이 조금 서툴러도 크게 책잡힐 일이 아니다.
대규모 외상거래가 아닌 한 사기당할 위험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금융은 다르다. 거래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 피부색도 문제가 된다. 모든 거래가 외상거래이므로 항상 사기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
금융업에서 경쟁력은 기본적으로 자금력과 정보력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하나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있어야 한다. 자금이 있으면 정보가 몰려오고 정보가 있으면 자금이 몰려온다고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자금을 가진 사람과 정보를 가진 사람이 다르면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가 발생한다. 좋은 투자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기꾼인지 진실한 사람인지 알기 어렵다.
애초부터 조달한 돈을 통째로 들고 야반도주할 생각을 먹고 접근하는 일은 많지 않더라도 수익성을 부풀려 말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금력과 정보력이 겸비돼 있지 않으면 기동성이 떨어지고 사기 당할 가능성이 많다.
1980년대에 일본 금융회사들이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외 진출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자금력은 있으나 정보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일본계 금융회사들에 돈을 빌려달라거나 투자해달라는 사람들이 파리떼처럼 붙었지만 그 중의 대부분이 사기꾼이었다. 다른 금융회사에서 이미 퇴짜를 맞은 낮은 등급의 사람들이 일본계 금융회사에 접근했다.
일본계 금융회사들의 정보력이 떨어졌던 것은 국제금융계가 일본인을 네트워크에 편입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미계 백인들로 구성된 국제금융 네트워크에서 일본인은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돈이 있으니 형식적으로는 관계를 유지했으나 진정한 내부자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정말로 돈이 되는 정보는 내부자끼리만 공유하고 일본인에게는 신통치 않은 정보만 제공했다.
우리나라 금융회사들의 처지는 어떨까. 일본계보다도 취약하지 않을까. 영미계 백인들이 일본인을 내부자로 대우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경외심은 가지고 있다. 할복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무라이 전통에 대한 두려움, 깍듯한 예의, 간결하고 소박한 문화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에 대해서는 이런 감정조차 없다. 영어가 서툴러 말이 통하지 않기는 일본 사람 못지않다. 더욱이 한국계 금융회사들은 자금력 면에서도 일본계에 크게 뒤진다.
현재 해외에 진출해 있는 우리나라 금융회사들의 현지 경영실태를 보면 이러한 정황이 확연히 드러난다. 말이 해외에 진출해 있는 것이지 현지의 교포나 해외에 진출한 국내 기업과의 거래가 대부분이다. 현지인과의 거래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금산분리는 사치다. 우리나라 기업 중에서 그나마 자금력과 해외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제조업체다. 해외에 브랜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존재도 제조업체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자원을 스스로 묶어 놓고 금융의 글로벌 경쟁력을 논하는 것은 난센스다. 금융회사의 글로벌 경쟁력은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바탕으로 10년, 20년을 내다보면서 긴 호흡으로 키워 나가야 한다.
관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