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시기가 눈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어느곳 하나 ‘만전을 기했다’고 자신하는 곳이 없다. 은행과 증권사의 의사결정 라인에 있는 고위층들은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실무진의 보고서에 당황하고 있으며, 심지어 종금사나 지방은행등 심심치 않게 파생상품 거래를 하는 금융기관들도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내년 새 기준 적용을 강행한다는 방침에 변함이 없다. 모든 파생상품 거래를 평가해 재무제표상에 반영하겠다는 정부 당국의 의욕이 과연 현실성 있는 것인지, 관련 금융계 및 재계의 현황과 비교해 점검해봤다.<편집자>
■어떤 내용인가
전문분야이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면 그 내용이 매우 복잡하지만, 쉽게 풀자면 ‘모든 파생상품을 시가평가해 재무제표상에 반영한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까지 금융기관들은 매매용 파생상품에 대해서만 평가해서 장부에 기재했다.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헷지거래용 파생상품은 장부상에 올리지 않고 난외 각주사항으로만 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년 1월부터는 헷지거래용 파생상품에 대해서도 특정시점을 기준으로 시가평가해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에 반영해야한다. 즉 거래 목적과 관계없이 모든 파생상품을 시가평가해야하며, 강제사항은 아니지만 능력이 있는 금융기관이라면 헤지거래의 경우 기초거래와 파생상품거래를 대칭적으로 인식하는 위험회피회계를 적용해야한다.
여기서 파생상품거래는 先物 옵션 스왑등 모든 부문을 포괄한다. 어지간한 금융기관이나 대기업들은 대개가 파생상품거래를 하고 있으며, 트레이딩 목적이 아닌 위험회피용의 헷지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지난해 5월부터 올해 2월까지 4차례의 기초소위원회를 운영해 올 3월 공개초안이 작성됐다. 3월12일부터 4월말까지 45일간 공개초안이 예고됐으며, 3차례의 공개초안 검토를 위한 실무소위가 열렸다.
이 小委는 금융감독원의 은행감도1국, 증권감독국, 회계 감독국과 산업은행, 외환은행, 대우선물, 현대증권등의 실무자로 구성됐다. 공개초안의 이론적 타당성은 경희대 정혜영, 김문철 교수팀에 검토용역이 맡겨졌으며, 지난 6월29일자로 증선위를 통과해 최종안이 확정됐다.
■금융계 ·재계의 대처
궁극적으로 새 회계처리 기준은 파생상품을 거래하는 모든 금융기관과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의아스러울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는 대형 시중은행 및 증권사들조차 45일간의 공개초안 예고기간동안 내용을 정밀하게 파악하는 작업조차 제대로 안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금융기관들이 이 지경이니 대기업들도 말할 나위없다. 공개초안이 검토돼 증선위를 통과하기까지 관심있게 회계제도의 변화를 쫓아갔던 곳은 실무소위에 참여했던 금융기관들 정도 였다.
새 회계처리 기준을 수용해야할 당사자들이 이 정도까지 무심하게 흘려버렸던 데는 당국에도 책임이 있다.
인터넷에 띄웠다고는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홍보하고 알리는 작업에 소홀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더욱 큰 문제는 금융기관과 대기업들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파생상품 등의 회계처리’는 온갖 골치아픈 업무분야가 서로 맞물려 그 난해성에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파생상품 거래와 관련된 실무에 해박해야하며, 동시에 회계실무에도 정통해야한다. 여기에 전산부문의 기술이 결합돼야 새로운 회계처리 기준을 수용할 준비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금융기관과 대기업에 이러한 전문성을 골고루 갖춘 인재를 찾아보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일례로 한 증권사는 ‘공개초안’이 나왔을 때 기획담당부서 실무진이 내용을 물어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파생상품 거래를 아는 국제금융 담당 부서로 떠 넘겼다.
그러나 파생상품을 아는 팀에서도 회계 지식이 부족하다는 한계 때문에 대충 얼버무린 채 몇 달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대개가 이런 식이다 보니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적절히 준비하고 있는 곳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유선으로 확인해본 결과 일부 지방은행과 종금사등의 금융기관 가운데는 내용을 아예 모르고 있거나, ‘그런 게 있다더라’는 정도만 파악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기업들중에도 ‘거래 은행과 협의해 봐야겠다’는 무책임한 응답이 적지 않았다.
■시기는 어떤가
새로운 회계처리 기준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논외다. 일을 주관하는 금감원의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금융기관의 실무진들도 새 기준의 도입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며, 그런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제정 취지대로 국제수준의 회계처리 기준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방향이며, 리스크를 줄이고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도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는 시행시기에 있다. 과연 당국이 공표한대로 2천년 1월에 시행하는 게 옳으냐는 것이다. 이에대해 대부분의 금융기관들은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있다.
무슨 내용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기업들이 태반이고, 전산시스템을 준비하거나 각 금융기관 또는 기업체 별로 실무적인 검토를 할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충분한 전문인력이 있고, 내용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문제가 안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지적이다.
■예견되는 문제들
회계처리 실무에 들어가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논란거리들이 등장하지만, 일반론으로만 들여다 봐도 걸리는 문제들이 있다. 우선 2천년초는 Y2K 문제가 겹쳐지는 시기다.
당국은 그래서 회계당사자들의 메인프레임은 건드리지 말고 ‘엑셀’같은 범용 연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새 회계기준대로 계산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그러나 엑셀로 정밀한 계산이 가능할지 의문이며, 상당부분의 작업을 수기처리에 의존하는 식이 돼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금융상품의 개발마저 3개월간 보류시킬 정도로 Y2K 문제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는데, 굳이 이 시기에 강행할 이유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충분한 준비없이 시작할 경우 기업체들은 번거로운 회계처리절차로 인해 아예 파생상품거래를 통한 ‘리스크 헷지’자체를 기피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귀찮으니 말자’는 식의 소극적인 거래 패턴이 확산될 경우 그 자체로 우리 경제는 심각한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또, 아예 헷지거래를 매매거래로 처리하는 회계상의 분식이 일반화될 소지도 있다. 금융기관들이 제기하는 문제로 해외점포의 이중 회계에 따른 불편함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와 같은 방식의 회계기준을 사용하는 국가가 전무한 상황에서 해외점포들은 결국 현지회계기준과 우리나라 회계기준에 각각 맞춘 두번의 회계를 소화해야한다.
불편함은 물론이고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외국 금융기관의 서울지점도 똑같은 불편을 겪어야 한다.
■왜 서두르나
업계는 오히려 당국이 제도 시행을 왜 이렇게 서두르는 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미국의 경우 같은 내용의 회계처리 기준을 98년6월에 제정했지만, 2천1년으로 적용시기를 미뤘드며, 국제회계기준 역시 98년말 제정돼 시행은 2천1년으로 잡혀있다. 우리나라가 내년에 시행하면, 세계 최초가 된다.
그러나 과연 세계 최초로 새 회계기준을 적용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파생상품 거래와 관련한 각종 인프라가 선진국에 뒤져있다. 전문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시장의 규모도 작다.
그렇다면 오히려 선진국의 제도시행을 보고 뒤따라 가도 늦지 않다는 논리가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기반은 낙후돼있는데 회계제도만 선진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지적이다.
증권업계 일각에서는 금감원 실무진의 과잉의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혹시 금감원측이 ‘세계 최초‘ ‘새 밀레니엄에 새 회계기준 도입’이라는 슬로건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연기 불가피론
금융기관들은 시행 시기의 연기 또는 점진적 시행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등과 맞추어 2천1년으로 늦춰 잡거나, 아니면 파일럿 금융기관을 선정해 시험적으로 적용해보고 점진적으로 확산하는 방안도 가능하다는 것.
이제라도 당국이 발벗고 나서 각 금융기관 및 주요 대기업의 새 회계기준 대응 상황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점검해본 결과 감당하기 어려운 시행착오가 우려된다면, 과감히 시행을 연기할 필요가 있다는 중론이다.
성화용 기자 yong@kf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