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주년을 앞둔 황기연 한국수출입은행장이 대출·보증 중심이던 정책금융에 직접투자와 선금융을 더하며 기업 지원 방식을 넓히고 있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벤처기업에 직접 자금을 공급하는 한편 해외 발주처에 금융을 먼저 제공해 우리 기업의 수주 기회를 확보하는 데 힘을 싣고 있다.
수은은 올해 6월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퓨리오사AI에 200억원을 투자하며 설립 이후 첫 벤처기업 직접투자에 나섰다. 10월에는 암모니아 기반 무탄소 발전기술 기업 아모지에 2000만달러를 직접투자하기로 했다. AI 전환 특별프로그램을 통한 금융지원 실적은 8월 말 기준 2조3000억원에 달한다.
해외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전력공사에 12억달러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며 우리 기업의 전력 인프라 사업 진출 기반을 넓혔다. 기술력은 있지만 매출이 적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을 위한 특례대출도 마련했다.
35년 수은 경험 바탕 ‘현장경영’
황 행장은 1990년 수은에 입행한 내부 출신 행장이다. 서비스산업금융부장과 기획부장, 남북협력본부장 등을 거쳐 2023년부터 상임이사로 리스크관리와 디지털금융, 개발금융 업무를 맡았다. 기업 지원과 조직 운영, 위험관리까지 경험한 인물이 수은의 새로운 금융수단을 현장에 연결하고 있다.지난해 11월 6일 취임 당시에는 미래 성장 전략산업을 선제적으로 육성하고 통상 환경 변화에 놓인 수출기업을 지원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글로벌 사우스 지역과의 협력을 강화해 우리 기업의 새로운 기회를 넓히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취임 이후에는 지역의 기업 현장을 적극적으로 찾았다. 올해 1월 충북 음성의 화장품 제조자개발생산(ODM) 기업 코스메카코리아와 오송의 의약품 제조기업 한국비엠아이를 방문해 K-뷰티·바이오 산업의 현황을 살폈다.
황 행장은 이 자리에서 연구개발부터 시설투자, 수출, 해외사업까지 기업의 성장 단계별 자금 수요에 맞춰 금융지원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월에는 울산의 반도체 패키징용 접합소재 기업 덕산하이메탈과 경북 영천의 에너지저장시스템(ESS) 부품 기업 한중엔시에스를 찾았다.
올해 초 AI 전환 특별프로그램을 발표한 이후 지역 소재·부품·장비 기업을 찾아 금융지원 방안을 논의한 것이다. 한중엔시에스 측은 해외 생산거점 확보와 수주 확대를 위한 금융지원을 요청했고, 황 행장은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에 필요한 외화 조달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답했다.
9월에는 광주의 반도체 패키징·테스트 기업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와 여수의 반도체 화학소재 기업 재원산업을 방문하며 호남권 반도체 생태계로 보폭을 넓혔다.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는 AI 반도체 패키징·테스트 수요 증가에 따른 추가 공장 건설 등 설비투자 계획을 설명했고, 재원산업도 첨단전략산업의 선제 투자에 대한 금융지원을 요청했다.
충청의 뷰티·바이오부터 영남의 소재·부품, 호남의 반도체 기업까지 황 행장의 현장 행보는 지역과 산업을 두루 아울렀다. 기업마다 다른 연구개발·설비투자·해외 진출 수요를 직접 살피고, 수은의 금융지원 방향을 논의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AI 금융 2.3조 지원…벤처 직접투자 첫발
황 행장 체제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대출과 보증 중심의 지원 방식에 투자를 새로운 축으로 더한 점이다. 재무 여력이나 담보가 충분하지 않아 대출을 받기 어렵더라도 기술력과 성장성이 있는 기업에 자본을 공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제도적 기반은 지난해 12월 개정돼 올해 6월 24일 시행된 수출입은행법이다. 종전에는 대출이나 보증을 제공한 기업에 한해 투자할 수 있었지만 법 개정으로 이 같은 제약이 풀렸다.
수은은 제도 시행 직후인 6월 AI 반도체 팹리스 기업 퓨리오사AI에 200억원을 직접투자했다. 상환전환우선주(RCPS)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수은 설립 이후 첫 벤처기업 직접투자 사례다. 앞서 AI 반도체 기업 리벨리온과 클라우드 기업 메가존클라우드에는 프로젝트펀드를 통해 각각 200억원을 간접투자했다.
지난달에는 미국 기후기술 기업 아모지에 대한 2000만달러 직접투자를 결정했다. 아모지는 암모니아를 활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무탄소 발전기술 기업으로, 발전모듈 양산과 상업화를 위해 총 2억달러 규모의 시리즈C 투자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수은은 이 투자 유치에 대표 투자자로 참여한다. 투자 대상을 AI에서 청정에너지 분야로 넓힌 사례다.
펀드를 통한 간접투자도 확대한다. 수은에 따르면 지난 8월 설립 이후 처음으로 벤처투자조합 출자를 결정했으며, 9월에는 AI·첨단전략·K-컬처 분야 펀드에 3000억원을 출자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직접투자와 펀드 출자를 함께 활용해 유망 기업에 자금이 공급되는 경로를 다변화하겠다는 것이다.
AI 산업 전반에 대한 금융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수은은 올해 1월 AI 전환 특별프로그램을 발표하고 5년간 대출·보증 20조원과 투자 2조원 등 총 22조원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올해 8월 말까지 누적 지원실적은 2조3000억원이다.
지원 대상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인프라부터 AI 모델·솔루션, 로봇과 AI 공장 등 활용 분야까지 아우른다. 기업의 성장 단계와 자금 수요에 따라 대출·보증과 투자를 활용해 AI 산업의 여러 영역을 뒷받침하는 구조다.
기술평가 활용 대출 신설로 중기 지원
수은은 올해 9월 중소·벤처기업의 창업부터 성장, 재기까지 지원하는 ‘수은형 생산적 포용금융’을 도입했다. 기업이 성장 단계마다 겪는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덜고, 기술력과 성장 가능성을 갖춘 기업에 정책금융이 보다 폭넓게 공급될 수 있도록 지원 방식을 다변화한 것이다.우선 기술력은 갖췄지만 매출 규모가 작아 대출심사에 어려움을 겪는 벤처기업을 위해 기술특례대출을 신설했다. 신용평가 대신 기술평가를 활용하는 상품으로, 연매출 20억원 이상 기업에 우량 중소기업 수준의 금리를 적용해 최장 3년, 최대 50억원을 지원한다. 매출과 재무실적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기업도 보유 기술을 바탕으로 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수출입 실적이 있는 기업이 긴급 운영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신속특례대출도 도입했다. 재무등급과 사업이행능력평가 등을 통해 최대 5억원을 지원하며, 비수도권 소재 기업에는 추가 금리 우대를 제공한다. 지역 기업이 수출입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을 보다 원활하게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중소기업의 금융비용 부담을 덜기 위한 방안도 마련했다. 수은이 신용보증기금에 특별출연해 보증서를 이용하는 기업이 부담하는 보증료를 3년간 총 3.0%포인트까지 지원하고, 중·저신용기업의 이자 부담 완화를 위한 신용평가체계 합리화도 추진한다.
성장 단계의 기업에는 투자와 대출을 연계한다. AI와 첨단전략산업, K-컬처 분야의 벤처펀드 투자기업에 기술대출을 추가로 지원하고, 벤처캐피털(VC) 운용사 및 금융기관과의 공동 지원도 강화할 방침이다. 직접투자와 펀드 출자에 대출을 연결해 기업이 연구개발과 사업 확장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정책금융의 경로를 넓힌 것이다.
경영 정상화와 재도전을 위한 지원도 포함됐다. 원리금을 성실하게 상환하는 구조조정 중소기업에는 금리를 연 1%로 낮추고, 이자 절감분을 원금 상환에 활용하도록 유도한다. 회수 가능성이 낮은 162억원 규모의 장기 미회수 특수채권을 소각해 기업인의 재기를 돕는 방안도 추진한다.
필리핀·멕시코 등 신시장 기반 확충
해외 수주 지원에서는 사업 발주 전부터 발주처에 자금을 제공하는 ‘선금융’이 강화됐다. 발주처와 금융 협력을 먼저 구축해 향후 우리 기업의 사업 참여 기회를 넓히는 방식이다.수은은 지난 8월 사우디 전력공사에 12억달러 규모의 자금을 지원했다. 사우디 전력공사가 추진하는 송배전망 확충과 발전 사업 등에 국내 기업이 참여할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사우디 전력공사는 지원자금을 한국 기업에 대한 사업 발주와 대금 결제에도 활용할 방침이다.
대형 전력 인프라 사업은 시공사뿐 아니라 기자재와 부품을 공급하는 중소·중견기업에도 수출 기회가 이어질 수 있다. 다만 실제 수주 규모와 참여 기업은 향후 발주와 계약 진행에 따라 구체화될 전망이다.
투자개발형 사업에 대한 지원 제도도 개선했다. 우리 기업이 재무적 투자자와 합산해 사업 지분 10%를 확보하면 지원할 수 있도록 해 수은이 사업 초기부터 투자자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기업이 사업을 수주한 뒤 금융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업 개발 단계부터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 범위를 넓힌 것이다.
수은은 3월 한국수력원자력, 필리핀 전력기업 메랄코와 원전 사업 개발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원전 사업에 대한 금융지원 검토와 우리 기업 참여 시 맞춤형 금융 패키지 제공 등이 협력 내용이다. 황 행장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협약식에 직접 참석했다.
9월에는 멕시코 대외무역개발은행과 1억달러 규모의 전대금융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수은이 현지 은행에 자금을 제공하면 현지 은행이 한국 기업의 수출 물품을 수입하는 업체에 대출하는 방식이다. 필리핀과 멕시코 사례는 협력 방안을 추진하는 단계로, 향후 계약과 금융지원으로 이어질 경우 성과가 구체화될 전망이다.
투자 전용 평가모형 신설…위험관리 체계도 정비
수은은 장기·위험자본 공급이 늘어나는 데 맞춰 위험관리 체계도 정비하고 있다. 기업의 부실 위험을 측정하는 신용평가시스템을 전면 개편하고, 기술력과 성장성을 중점적으로 살피는 투자 전용 신용평가모형을 신설하기로 했다.기존 대출 심사와 다른 기준으로 투자 대상 기업을 평가해 투자 확대에 따른 위험을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AI 기반 여신감리 조기경보모형을 활용해 부실 징후를 사전에 포착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직접투자와 선금융 등으로 정책금융의 역할을 넓힌 수은이 앞으로 기술기업의 성장과 해외 수주를 실제 성과로 연결하고, 투자 확대에 걸맞은 심사·사후관리 역량을 갖추는 것이 황 행장 체제의 과제로 남는다.
장호성 한국금융신문 기자 hs6776@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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