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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에서 길어 올린 색

장종회 기자

jhchang@fntimes.com

기사입력 : 2026-04-22 16:07

김상경 '푸른 숲의 시간' 전시회
28일부터 강남 청담 ‘갤러리 두’

[한국금융신문 장종회 기자] 오는 4월 28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갤러리 두(Gallery DOO)에서 김상경(57) 작가의 스물여섯 번째 개인전 ‘푸른 숲의 시간’이 막을 올린다.
오는 5월 16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제주·하와이·뉴질랜드 등지를 누비며 쌓아 올린 김 작가의 신작 위주로 구성된다. 김 작가의 이번 전시는 단순한 '신작 공개'가 아니라 한 작가의 생사관(生死觀)이 화폭 위에서 마침내 완성형에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다가온다.
소녀와 까마귀와 은검초, 53×45.5cm, 캔버스에 아크릴, 2026

소녀와 까마귀와 은검초, 53×45.5cm, 캔버스에 아크릴,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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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인간이 느끼는 세상

김상경 작가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해 그는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대수술을 받았다. 마취와 꿈, 무의식이 뒤엉킨 그 시간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타나토스(thanatos)'의 공간이었다. 수술에서 깨어난 뒤 제주도로 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거문오름에서 마주친 천남성의 유선형 잎,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억새, 그리고 시야 가득 펼쳐진 하늘은 그에게 '살아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언어였다. 그 때 이후 그의 풍경화는 단순한 자연 묘사를 넘어서 생명 그 자체를 향한 경이를 기록하는 작업이 됐다.
하귤나무와 초코비와 두마리 까마귀, 112x145.5cm, 캔버스에 아크릴, 2026

하귤나무와 초코비와 두마리 까마귀, 112x145.5cm, 캔버스에 아크릴,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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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작가의 이번 전시에서 화두는 '화자(話者)'이다. 캔버스 안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자리잡고 있다. 소년과 소녀, 까마귀와 푸른 새, 그리고 반려견. 이 존재들은 풍경의 배경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림 밖의 관람객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넨다. 롤랑 바르트가 자서전 서문에서 "이 모든 것은 소설 속 화자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김 작가의 풍경도 화자의 시선으로 구축한 서사다. 화자는 때로 작가 자신일 때도 있고, 때로는 그가 사랑했던 주변 인물들일 때도 있다. 때로는 강아지처럼 말없이 곁을 지키는 존재일 수도 있다.

시공 초월한 생명의 연대

김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까마귀는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고구려 '삼족오'와 '견우와 직녀' 설화 속 길조인 까마귀는 작가의 화폭에서 인간의 언어가 존재하기 이전 시대로부터 살아 돌아온 영물로 기능한다. '브레드트리와 까마귀와 은검초' 연작에서 까마귀는 하와이 원시 식물들 사이에 자리 잡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명의 연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따라비오름과 붉은새와 붉은말1, 65.2x100cm, 캔버스에 아크릴, 2026

따라비오름과 붉은새와 붉은말1, 65.2x100cm, 캔버스에 아크릴,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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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을 지배하는 가장 강렬한 요소는 색이다. 난색(暖色)과 한색(寒色)의 극단적 대비, 몽환적이면서도 뚜렷한 채도는 보는 이를 시공간이 뒤틀린 세계로 끌어당긴다. 이 색의 언어는 초기 인물화를 그리던 시절부터 갈고 닦은 것이다. 인간 감정의 복잡한 결을 조색(調色)으로 포착하던 그의 솜씨가 제주와 하와이의 대지로 전이되면서, 김 작가의 풍경화는 지형을 그리는 것이 아닌 대지의 기운을 그리는 그림이 되었다.

현대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가 영국 요크셔의 빛을 포착했다면, 김상경은 화산섬 특유의 붉은 흙과 울창한 초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에너지를 화폭에 담는다.

자신을 마주하는 실존적 사건의 기록

김상경 작가의 작업 방식도 흥미롭다. 그는 현장에서 받은 첫인상을 사진으로 기록한 뒤 작업실로 돌아와 소형 스케치부터 시작해서 대형 캔버스로 확장한다. 현장의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숙고를 거친다는 얘기다. 그는 제주·하와이에 이어 올해 초에는 뉴질랜드 남북 섬을 자동차로 종단했다. 남반구의 여름은 그가 평생 체감한 계절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김 작가에게 여행은 그 자체로 조형을 연구하고 색을 얻어내며 작업의 이어가는 맥을 찾는 작업이다. 제주도와 하와이가 그에겐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나 작품 소재가 아니라 자신을 마주하는 '실존적 사건'이고 풍경화는 그 기록이다.
이번 전시에는 아직 그 기억이 작품으로 다 옮겨지진 않았지만, 예고편처럼 그 에너지가 전시장 곳곳에 배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상경 작가 '푸른 숲의 시간' 전시회 포스터

김상경 작가 '푸른 숲의 시간' 전시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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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한 김 작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2017년·2021년·2024년 세 차례에 걸쳐 소장되었다. 미술관이 반복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작가의 작업이 단발적 유행이 아닌 시간을 견디는 힘을 지닌다는 방증이다.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고 했다. 김상경에게 제주와 하와이, 뉴질랜드는 그저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나선 여정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은 뒤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된 '실존적 사건'들이었다. 그 사건들이 녹아든 ‘푸른 숲의 시간’ 전시는 생과 사,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화면으로 품어내는 자리다. 관람은 무료다.

장종회 한국금융신문 기자 jh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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