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자금을 이용한 2차 자본 투입 이후 일본 은행들이 선택한 길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31321473103554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공적자금은 은행의 자본을 확충하여 당장의 파국을 막았을 뿐 누적된 부실자산과 취약한 수익구조를 해소하고 느슨한 신용관리 관행을 개선하는 근본적인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부실 정리와 구조개혁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오히려 정부가 대형 금융기관의 파산은 어떻게든 막아준다는 시장의 인식을 심어주며 '대마불사'라는 믿음을 공고히 했다. 대형 금융기관의 연쇄 파산 우려가 사라지자 은행권에는 정부 지원으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안도감이 퍼졌고 모럴 해저드도 심화되었다.
금융시스템 붕괴에 대한 우려가 완화되자 감독 당국의 구조조정 압력은 느슨해졌고 은행들 역시 과감한 부실 정리와 손실 인식을 회피할 유인이 커졌다. 이러한 환경에서 은행들이 선택한 생존 전략은 체질 개선이 아닌 BIS 자본 규제 비율을 충족하는 데 급급한 방어적 대응이었다. 1999년 이후 은행들은 겉으로는 수익성 제고와 국제 기준 도입을 내세웠으나 실제 사활을 건 과제는 당국의 8% 규제 선을 지켜내는 데 있었다.
문제는 자본비율을 맞추는 방식이었다. 은행들은 영업이익을 통한 내부 유보나 손실을 감수하는 적극적인 대손상각을 회피한 채 대출을 줄이고 위험가중자산을 축소하여 장부상 자본비율만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다. 한계기업에 대해서는 대출 만기를 연장하거나 추가 자금을 공급하는 '에버그리닝(Evergreening)'으로 손실 확정을 회피하는 한편 신규 대출은 엄격히 억제하고 위험가중치가 낮은 일본 국채 등 안전자산 운용을 늘렸다. 개별 은행의 입장에서는 당장의 자본 잠식과 영업정지를 피하기 위한 합리적 생존책이었지만 은행들이 일제히 대출을 줄이면서 시스템 전체의 신용공급이 위축되고 경기 회복이 지연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공적자금으로 은행의 파산은 막았지만 금융 본연의 기능인 신용의 선별과 자금의 효율적 배분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연명 대출로 회생 가능성이 낮은 부실기업에 자금이 묶인 반면 성장 가능성이 높은 혁신 기업으로 흘러가야 할 신용 공급은 막혀버렸다.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 투입된 공적자금이 역설적이게도 은행의 위험회피적 경영과 부실 처리 지연을 정당화하며 일본 실물경제의 회복을 가로막는 결정적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다.
안정이라는 착시: 멈춰 선 구조조정과 잔존하는 부실
1999년 3월 은행에 대한 2차 자본 투입은 일본 금융위기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대형 금융기관의 연쇄 파산 공포가 사라지자 단기 자금시장은 빠르게 정상을 되찾았고 금융시스템이 최악의 국면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확산했다. 단기적인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고 시스템의 붕괴를 막는다는 당면 과제는 달성된 셈이었다.그러나 금융시장의 안정세가 은행시스템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적자금을 이용한 자본 투입은 BIS 자기자본비율을 높였을 뿐 은행 대차대조표를 압박하던 부실자산 자체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장기 불황과 부동산 가격 하락이 지속되면서 대출 담보로 활용된 부동산의 가치도 계속 떨어졌고 은행의 수익 기반과 신용평가 역량 역시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즉 공적자금은 자본 부족이라는 급성 증상을 완화했을 뿐 자산의 질과 수익 구조라는 만성 질환까지 치유하지는 못한 것이다.
더 치명적인 문제는 위기의식이 희미해지면서 구조조정의 동력마저 약화된 것이었다. 대형 금융기관의 연쇄 파산에 대한 시장의 공포가 완화되자 정책 당국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밀어붙일 명분을 잃었고 부실 청산을 요구하는 시장의 압력도 현저히 수그러들었다. 은행들 역시 공적자금을 통해 어렵게 확충한 자본이 부실자산의 대손상각으로 다시 훼손되는 것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위기의 진정이 부실 처리를 촉진하기보다 오히려 지연시키는 역설이 발생했다.
따라서 1999년의 안정은 은행의 부실이 해소된 결과라기보다 공적자금으로 금융시스템의 붕괴 위험을 일시적으로 차단함에 따라 발생한 일시적 착시 효과에 가까웠다. 공적자금 투입은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았지만 은행 대차대조표에 남아 있던 부실자산까지 제거하지는 못했다. 위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는 은행의 파산을 막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최악의 고비를 넘긴 뒤에는 부실자산을 정리하고 손실을 투명하게 인식해 은행의 재무건전성을 회복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췄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의 정책 당국과 금융권은 이 일시적 안정을 구조적 회복으로 착각한 채 근본적인 부실 정리를 뒤로 미뤘다. 당국의 방임 속에서 은행들은 부실자산을 신속히 상각해 손실을 인식하기보다 기존 자본의 훼손을 막으며 외형상의 BIS 자기자본비율을 방어하는 데 골몰했다. 그 결과 구조조정은 표류하거나 사실상 중단되었다.
숫자의 방어: 자본 확충 대신 선택한 '자산 쥐어짜기'
이후 일본 은행들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자본비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이었다. 당시 자본 투입에는 부실채권 처리와 경영 개선이라는 조건이 부과되었지만 금융시장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당국의 구조조정 압력은 점차 약해졌다. 하지만 은행들로서는 규제 기준인 BIS 자기자본비율을 지속적으로 충족해야만 했다.결국 은행들이 선택한 길은 자기자본 자체를 확충하는 정공법이 아니라 위험가중자산을 줄여 장부상 비율만 맞추는 편법적 대응이었다. 당시 은행들의 입장에서는 신규 대출을 줄이거나 위험가중치가 높은 자산을 처분하면 자기자본을 추가로 확충하지 않고도 자기자본비율을 단기간에 높일 수 있었다. 자기자본비율 관리의 중심축이 '자본을 키우는 방식'에서 '자산을 쥐어짜는 방식'으로 급격히 선회하기 시작한 배경이다.
이 과정에서 은행의 자산 운용 기준이 수익성과 성장성 중심에서 자본소모량 중심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평가 기준이었던 경제적 수익성과 기업의 성장 가능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해당 자산을 보유하는 데 얼마의 자기자본이 소모되는가'가 최우선 기준이 되었다. 위험가중치가 높은 기업대출은 자본 소모가 큰 반면 일본 국채 같은 안전자산은 무위험자산으로 분류되어 자본 부담이 거의 없었다. 그 결과 은행들은 기업대출을 회수하고 수익률이 낮더라도 위험가중치가 0%인 국채를 대거 사들이는 안전자산 중심의 포트폴리오 재편에 몰두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자산 축소 전략이 이중적인 대출 행태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은행들은 위험가중자산을 줄이기 위해 신규 대출을 엄격히 통제하고 성장 가능성이 높더라도 신용위험이 존재하는 혁신기업에 대해서는 신용 공급의 문턱을 한층 높였다. 그러나 정작 정리가 시급한 부실기업에 대해서는 대출을 회수하지 않았다. 부실 대출을 적극적으로 정리하고 상각하는 것은 곧 부실의 확정과 자본 훼손을 의미했기에 만기를 연장하거나 추가 자금을 공급하는 ‘에버그리닝’으로 손실 인식을 미루는 길을 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위험은 크지만 성장 잠재력이 높은 혁신기업에는 자금 공급을 억제하면서 생존 가능성이 낮은 부실기업에는 연명 자금을 계속 공급하는 기형적인 자금 배분이 고착화되었다.
개별 은행의 입장에서 이러한 선택은 규제 비율을 맞추고 당장의 파국을 피하기 위한 합리적 생존책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은행이 같은 선택을 하면서 금융시스템 전체에는 치명적인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가 발생했다. 자금이 생산성과 성장성이 높은 부문으로 흘러가도록 선별하고 배분하는 금융시스템 본연의 자원 배분 기능이 크게 훼손된 것이다. 은행들은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대출을 축소했고 그 결과 생산적 부문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중개 기능은 위축되었다.
부실 정리에서 부실 관리로: 연명과 미루기가 만든 '좀비의 경제학'
당국과 시장의 부실 정리 압박이 줄어들자 부실채권을 처리하는 은행들의 태도 역시 소극적으로 돌아섰다. 금융기관의 연쇄 파산으로 시스템적 위험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는 부실채권을 상각하고 자본을 확충해 대차대조표를 정상화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시스템 붕괴라는 최악의 고비를 넘기자 부실을 한꺼번에 털어내기보다 손실 인식을 유예하며 시간을 버는 행태가 은행권 전반에 보편적 관행으로 고착되었다. '부실의 적극적 정리'에서 '부실의 소극적 관리'로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이다.은행들은 부실을 인정해 손실을 확정하는 것을 어떻게든 미루려 했고 기업들은 부실기업으로 판정돼 파산하는 상황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 했다. 이러한 양측의 단기적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부실의 처리는 계속 미뤄졌다. 이는 은행 입장에서 부실채권을 상각해 당장 자기자본이 훼손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고 차입 기업 역시 대출 연장을 통해 파산이나 청산을 면하고 생존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대규모 부실을 안고 있던 은행의 경우 개별 대출의 부실을 인정하는 순간 다른 부실까지 연쇄적으로 드러나 자본이 추가로 훼손될 수 있다는 부담이 컸다. 결국 은행과 기업 모두 당장의 파국을 피할 유인이 강했고 그 결과 부실을 정리하기보다 대출을 연장하며 문제를 뒤로 미루는 에버그리닝이 확산됐다. 이는 기업의 경쟁력을 회복시키는 구조조정과 전혀 달랐다. 사업 구조 개선과 현금흐름 창출력을 강화하기보다 단지 대출의 부실화를 늦추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현상을 부추긴 것은 공적자금의 투입 규모 한계와 규제 체계의 모순이었다. 도쿄대학의 호시 다케오가 지적했듯이 1999년 투입된 7조 5,000억 엔의 은행에 대한 자본 투입은 시스템 붕괴를 차단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누적된 잠재 부실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에 엄격한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 기준이 적용되자 은행들은 부실을 조기에 정리하기보다 장부상 자기자본비율을 방어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손실을 즉시 인식하면 자본이 훼손되지만 인식을 늦추면 당장의 자기자본비율 하락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유인이 자산 건전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과정마저 훼손했다는 점이다. 당시 은행들은 대출 자산을 자체 평가하는 '자기 사정' 제도를 운용했으나 이는 규제회피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경영진이 제시한 목표 BIS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실무진은 대출의 위험도를 실제보다 낮게 평가하거나 부실 가능성이 높은 자산을 양호한 등급에 남겨두었다. 더구나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담보 가치가 크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감정가와 관행적 기준에 의존해 담보가 충분한 것으로 포장함으로써 부실이 장부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차입 기업의 현금창출 능력을 최우선으로 다루었어야 할 신용평가에서 은행들은 하락한 담보가치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채 대출을 '정상'이나 '요주의' 수준으로 관대하게 분류하며 대손충당금 적립과 손실 확정을 뒤로 미뤘다.
조직 내부의 인센티브 구조 역시 부실의 조기 인식과 정리를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부실을 선제적으로 인정하고 대손충당금을 쌓아 손실을 반영하면 당장 실적이 악화되고 기존 대출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반면 부실을 은폐하고 정상 대출처럼 위장해 연장하면 당장의 실적 악화와 부담을 피할 수 있었다. 위험의 선제적 관리보다 위험의 은폐가 영업 현장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는 왜곡된 인센티브 구조가 자리 잡은 것이다.
정상적인 여신 심사에서는 기업이 대출을 상환할 수 있을 만큼의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대규모 부실이 누적된 데다 규제 자본비율에 대한 압박까지 커지면서 여신 심사의 초점은 ‘이 기업의 상환능력이 충분한가’에서 ‘이 대출을 지금 부실로 분류하면 장부와 자본비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로 옮겨갔다. 위험을 식별하고 그에 부합하는 가격을 매기는 금융 본연의 기능이 부실 인식과 손실 반영을 늦춰 BIS 자기자본비율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은행의 부실 대출 연장은 실물경제에 '좀비기업'의 확산이라는 치명적 결과를 낳았다. 호시 다케오가 '죽었어야 할 기업의 경제학(Economics of the Living Dead)'이라고 표현했듯이 경쟁력을 상실했음에도 은행의 연명 자금에 힘입어 시장에 잔존하는 한계기업들이 늘어났다. 한계기업에 금융 자원이 지속적으로 묶이면서 정작 자금이 흘러가야 할 생산성 높은 유망 기업과 신성장 산업은 자금난에 시달렸다.
에버그리닝은 단순한 부실 대출의 처리 지연을 넘어 금융시스템의 자원배분 기능 자체를 훼손했다. 부실을 정리하고 생산성 높은 부문으로 자원을 재배분해야 할 금융시스템이 손실 인식을 미루고 기존 부실을 연명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개별 은행과 기업이 부실을 미루며 생존을 도모하는 동안 자금과 노동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자원 배분 메커니즘은 심각하게 마비되어 갔다. 은행들이 부실기업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연명시키는 동안 자원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한계기업에 계속 묶였고 결국 신성장 부문으로의 자원 이동이 차단되면서 경제의 성장 잠재력마저 꺾이고 말았다.
금융 안정의 역설: 자원 배분의 역설과 실물경제의 고사
은행들의 방어적 경영은 개별 은행의 생존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금융시스템 전체의 건전성과 실물경제의 회복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자기자본비율을 방어하는 데 집중한 은행들은 부실을 정리하기보다 대출을 연장했고 그 결과 금융시장의 표면적 안정과 실물경제의 회복 사이에는 점점 더 큰 괴리가 생겨났다. 은행들은 자본비율을 지키기 위해 신규 대출을 억제하는 동시에 기존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은 손실 확정을 피하려 그대로 유지했다. 그 결과 신용 공급은 양적으로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금이 정작 필요한 곳으로 흐르지 못하면서 신용 공급의 질적 수준 또한 현저히 저하되었다.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신용 배분의 왜곡이었다. 기술력과 성장 잠재력을 갖추었으나 담보가 부족하고 기존에 은행을 이용한 실적이 거의 없는 신규·혁신 기업은 자금줄이 막혔다. 반면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한계기업은 오랜 거래관계에서 형성된 구조적 유착과 은행의 손실 회피 욕구가 맞물리면서 연명 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받았다. 자금이 미래의 성장 기회를 찾아 이동하는 대신 부실기업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잠겨버린 것이다.
그 결과 신규 기업의 진입과 한계기업의 퇴출이라는 시장 경제의 자율 정화 메커니즘이 무력화되었다. 정상적인 금융시스템이라면 생산성이 떨어진 기업은 신용 공급이 줄어들면서 시장에서 퇴출되거나 구조조정을 거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노동과 설비 같은 실물 자원이 생산성이 높은 산업으로 재배분된다. 그러나 에버그리닝을 통한 연명이 일상화되면서 자원이 생산적인 곳으로 흘러가는 순환 고리가 사실상 끊겼다. 좀비기업들이 저금리와 대출 연장에 의존해 시장에서 연명하는 동안 건실한 기업들과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신규 진입 기업들은 인력 확보와 가격 경쟁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위기 초기에 이뤄진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 회수 유예가 실물경제의 급격한 충격을 완화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기업의 자금 압박을 덜어줌으로써 대규모 실업과 기업 파산의 급증을 막고 금융시스템의 즉각적인 마비를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기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임시 처방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위기의 충격을 완화하던 한시적 지원 조치가 적절한 출구전략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결국 구조조정을 가로막고 경제 전체의 성장을 꺾는 족쇄가 된 셈이다.
문제는 은행들이 단순히 리스크를 줄이려 했다는 점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서 리스크를 줄이려는 행동 자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진짜 문제는 위험을 줄이는 과정에서 ‘어떤 위험을 떠안고 어떤 기업을 살릴 것인가’를 가려내는 금융 본연의 선별 및 평가 기능마저 작동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개별 은행의 손실 회피와 자본비율 방어가 우선시되면서 금융시스템은 부실을 정리하고 자원을 재배분하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장은 금융시장의 표면적 안정을 금융시스템의 정상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표된 연체율과 부실채권 비율이 개선되고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이 규제 기준을 충족했음에도 시장의 불신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은행 주가는 장부상 자산가치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렀고 금융기관 간 자금거래의 위험 프리미엄 역시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은행이 발표하는 장부상 수치 뒤에 여전히 거대한 부실과 취약한 자본의 질이 숨겨져 있음을 시장이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장의 의구심은 2002년 다케나카 헤이조가 금융담당상으로 취임한 이후 단행된 전격적인 특별감사를 통해 숨은 손실과 취약한 실질 자본 여력이 드러나면서 비로소 사실로 확인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위기 진정이 가져온 착시와 안도감이 구조개혁의 동력을 꺾어버렸다는 점이다. 대형 금융기관의 연쇄 파산을 막고 유동성 위기의 확산을 차단한 것은 어디까지나 긴급 처방에 불과했다. 금융기관의 연쇄 파산과 유동성 위기를 막은 뒤에는 부실자산을 투명하게 평가하고 회생 불가능한 기업과 금융기관을 과감히 정리하여 자금이 성장 부문으로 다시 흐르도록 만드는 근본적인 구조조정이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위기의 급박한 고비를 넘기자 더 이상의 과감한 수술을 단행할 정치적·정책적 동력은 빠르게 소진되었다. 이러한 틈을 타 은행들은 부실의 신속한 정리 대신 장부상 자본비율을 방어하고 손실 인식을 미루는 데 몰두했다.
결국 일본의 경험은 금융위기 대응에서 은행을 살리는 것과 금융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과제임을 입증한다.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의 도산을 막아내는 데 성공할지라도 부실을 제대로 털어내지 못해 자원 배분 기능이 마비된다면 금융의 안정은 실물경제의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일본이 치른 가장 큰 대가는 금융시스템의 붕괴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붕괴를 막아낸 뒤 위기가 끝났다고 너무 성급히 판단하고 부실 정리와 구조개혁을 미룬 대가가 오히려 장기 침체로 이어졌다는 데 있었다. 금융위기의 최악의 고비를 넘긴 것은 구조개혁을 위한 출발선일 뿐 문제의 근본적 해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응급 처치 뒤에 남은 부실을 얼마나 신속하고 투명하게 정리하느냐에 위기 극복의 성패가 달려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세월'은 금융위기 이후 가장 위험한 순간이 다름 아닌 시장이 안정을 되찾고 섣부른 안도감이 밀려드는 바로 그 순간임을 경고하고 있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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