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없는 은행, 책임 없는 경영(상) : 내부 견제의 실종과 침묵의 카르텔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31321473103554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자산 가격 폭락은 위기의 발단이었고, 부실채권은 그 충격이 금융기관의 대차대조표에 남긴 상처였으며, 디플레이션은 그 상처가 실물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나타난 후유증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단기적 금융 불안에 그칠 수 있었던 이 충격이 왜 십 년이 넘는 장기 시스템 위기로 비화했는가 하는 점이다.
일본 금융위기가 장기화된 배경으로는 정치지도자들과 관료 조직이 여론의 향방과 이해관계자들의 눈치를 보며 소극적으로 대응해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지적이 가장 자주 거론된다. 이러한 진단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장기화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은행 내부의 리스크 통제 시스템과 외부 감시 체계가 동시에 무력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 은행들은 형식적으로는 민간 금융기관이었지만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책임 추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취약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었다. 주주들의 침묵과 이사회의 독립성 상실 속에 관료와 금융기관 그리고 기업의 이해관계가 카르텔처럼 얽히면서 은행의 부실채권은 철저히 은폐되었다.
시장 규율에 따라 당연히 퇴출되었어야 할 부실기업들이 도태되지 않고 수명을 연장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은행은 자산의 건전성과 대출 리스크를 엄격히 관리하는 본연의 기능을 잃고 눈앞의 부실을 은폐하며 책임을 미루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1990년대 일본 금융위기가 장기화된 핵심 이유는 단순한 자산 버블 붕괴에 따른 부실채권 증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누가 은행 경영을 감시하고 책임을 물을 것인가'라는 은행의 지배구조(governance) 자체가 사실상 무력화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일본 금융시스템은 그 과정에서 ‘주인 없는 은행, 책임 없는 경영’이라는 구조적 모순에 봉착했다.
겉만 현대적이었던 은행 지배구조, 마비된 통제가 낳은 파국
일반 기업의 실패는 주주와 채권자의 손실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은행의 파산은 다르다. 은행이 부실화되면 예금자의 자산뿐 아니라 경제 전체의 신용 창출 시스템까지 마비될 수 있다. 그래서 은행에 대해서는 일반 기업보다 훨씬 강한 감시와 규율 장치가 요구된다.1990년대 일본 은행들은 상장회사와 이사회라는 현대적인 지배구조의 외형을 갖추고 외부 회계감사와 감독당국이라는 시장 규율 체계까지 두고 있었지만 정작 경영진을 견제하고 책임을 묻는 실질적인 통제 메커니즘은 어디에서도 작동하지 않았다. 이러한 은행 지배구조의 취약성은 일본 금융위기를 장기화시킨 핵심 배경이었으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수익성과 자본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압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외부 충격을 흡수하고 위기를 견뎌낼 은행의 '손실 흡수 능력'이 근본적으로 약화되었다. 당시 일본 은행들은 수익성을 높이고 자본 효율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압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기업과 은행이 서로 지분을 보유하는 상호주식보유를 기반으로 한 경영권 방어 목적의 안정주주 체제는 경영진에 대한 외부 견제를 무력화했을 뿐만 아니라 한쪽의 부실이 상대방에게 고스란히 전이되는 구조적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여기에 정부의 암묵적 보호까지 더해지면서 시장 규율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은행권 전반에 수익성 개선보다 현상 유지와 부실기업의 연명을 우선시하는 경영 행태가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었다.
일본 은행들의 이 같은 저수익 구조는 은행업의 대표적인 수익성 지표인 대출금리와 예금금리의 차이로 인한 이익 즉 예대마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카고대학의 아닐 카시압(Anil Kashyap)의 분석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일본 은행들의 예대마진은 약 1%대 초반에 머물렀는데 이는 당시 3~4% 수준을 유지하던 미국 은행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일본 은행의 이러한 구조적 저수익성은 부실채권 충격을 흡수할 내부 완충 여력의 부족으로 이어졌고 이는 부실채권이 증가하자 시장의 신뢰 상실과 외부 자금조달 능력의 약화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견제와 책임 메커니즘의 부재는 경영진이 부실 처리를 미루며 시간을 벌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주주들의 적극적인 경영 견제와 경영진을 향한 독립적인 외부 감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경영진이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서둘러 단행할 유인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손실을 조기에 인식하는 순간 자기자본 훼손과 경영 책임 문제가 불거질 수 있었기 때문에 경영진으로서는 부실을 즉시 드러내기보다 만기 연장과 회계상 유예를 통해 시간을 버는 편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로 인해 은행 경영진은 자신의 임기 동안 폭탄이 터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회생 불가능한 부실기업들을 연명 치료하는 소위 ‘에버그리닝(Evergreening)’ 행태를 확산시켰고 이는 업계의 지배적인 관행으로 굳어졌다.
결국 일본 금융위기를 장기화시킨 것은 자산가격 하락 그 자체만이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충격을 조기에 인식하고 손실을 정리해야 할 은행 지배구조가 견제와 책임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채 마비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일본 은행들은 형식적으로는 민간 금융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장의 규율도, 주주의 견제도, 경영 실패에 대한 명확한 책임 추궁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조직에 가까웠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기형적인 지배구조 속에서 감시와 책임의 부재가 낳은 부실 은폐와 책임 회피의 도덕적 해이가 시스템 전체에 고착화되었다.
감시자를 지워버린 소유구조: 4대 주주가 만든 견고한 침묵의 카르텔
일본 은행의 지배구조가 왜 그토록 취약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주식 소유구조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 일본의 대형 은행들은 상장기업이었지만 실제 주주 구성을 보면 주주가 경영진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지배구조와는 거리가 멀었다.금융기관과 기업 간의 지분 상호보유 구조 속에서 주요 주주들은 은행과 밀접한 거래 관계로 엮인 공생 관계였다. 이 때문에 이들은 경영진의 방만 경영과 도덕적 해이를 감시하고 견제하기보다 상대방의 재무 악화와 경영 부실을 묵인하며서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일본 은행권에서는 시장 규율이 작동하기보다 서로의 경영 부실을 묵인하고 은폐하며 공동의 안위를 도모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었다.
IMF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일본 은행의 주요 주주는 크게 네 부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는 생명보험사였다. 당시 일본의 대형 생명보험사들은 세계 최대 규모의 기관투자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은행 주식을 단순한 재무적 투자 수익 관점에서만 보유하지 않았다.
이들은 주주로서의 권리보다 금융기관과의 장기적인 거래 관계 유지를 더 중시했다. 더욱이 생명보험사들은 은행의 자본 확충을 위해 발행된 후순위채의 주요 매입처이기도 했다.
즉 동일한 은행이 발행한 주식과 채권을 함께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실 발생 시 동시에 주식 투자 손실과 채권 투자 손실에 노출되는 구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의 부실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자신들이 보유한 자산 가치 하락에 따른 손실을 스스로 자초하는 꼴이었다.
결국 이러한 구조 속에서 생명보험사들은 원칙대로 책임을 묻는 투자자라기보다 경영진의 무책임한 경영을 묵인해 주는 ‘우호 지분’으로 기능했을 뿐이며 시장 규율을 확립하는 역할은 철저히 외면했다.
둘째는 차입 기업들이었다. 일본의 메인뱅크(main bank) 체제 아래에서는 은행과 기업이 서로의 주식을 보유하는 상호주식보유(cross-shareholding)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은행의 대출을 받는 제조업 및 상사 등 주요 대기업들이 보유한 은행 지분은 약 20% 정도에 달했다.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이었지만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들이 은행 경영진의 부실 경영이나 리스크 관리 실패를 강하게 제기하기는 어려웠다.
기업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주주로서 은행 경영진을 감시하는 기능보다 저금리 대출과 안정적인 자금 조달 그리고 장기 거래 관계의 유지였기 때문에 은행 경영진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자금줄을 위협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결국 상호주식보유는 경영진에 대한 견제 장치라기보다 기존의 폐쇄적인 유착 관계를 고착시키는 방패막이로 기능했다.
셋째는 전·현직 임직원들이었다. 일본 은행들은 종업원지주회와 임직원 주식보유 제도를 통해 내부 구성원의 지분 참여를 장려했다. 그러나 평생고용 관행과 끈끈한 선후배 관계에 길들여진 이들은 독립적 감시자라기보다 경영진의 완벽한 우호 세력이었다.
경영진에 대한 비판은 조직의 근간을 해치는 항명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연공서열과 내부 승진에 목을 매야 하는 문화 속에서 공개적인 문제 제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넷째는 다른 은행들이었다. 당시 일본 금융시스템에서는 외국 자본의 적대적 인수를 차단하고 금융시스템 안정을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은행 간 상호주식보유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외부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주가 변동성을 낮추며 금융시스템을 겉으로 안정시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 규율을 무력화하는 부메랑이 되었다.
은행들은 서로의 주요 주주였기 때문에 상대 은행의 부실 경영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거나 자정 노력을 압박할 경우 자신들이 보유한 주식 가치 역시 훼손될 수 있었다. 그 결과 부실을 조기에 드러내기보다 이를 뒤로 미루려는 유인이 강화되었다.
특히 이른바 ‘호송선단식 체제(convoy system)’의 금융 행정에서는 우량 은행이 부실 은행을 떠받치는 것이 사실상의 관행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결과 주주로서 작동해야 할 상호 견제와 시장 규율의 메커니즘은 사라지고 대신 상호 보호와 책임 회피의 구조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문제는 이처럼 이해공동체로 서로 얽힌 주주들의 소유구조가 단순히 우호적인 지분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실상 시장 규율을 무력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데 있었다. 시장의 규율도, 주주의 압력도, 내부 견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은행 경영진은 당장의 손실을 숨기고 부실을 미래로 넘기는 선택을 반복할 수 있었다.
침묵의 카르텔이 낳은 연명치료: 이사회 마비와 에버그리닝
이러한 왜곡된 소유구조는 필연적으로 이사회 기능의 마비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 은행의 이사회는 형식적 기구일 뿐 실질적으로는 내부 승진자와 대장성이나 일본은행 출신의 낙하산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다.이들 대부분은 은행의 이해관계나 관치금융의 관행에 깊이 연루된 인물들이었으며 경영진을 견제할 독립적인 사외이사는 극히 드물었다. 형식적으로 사외이사를 임명한 경우에도 주요 거래기업이나 금융권 출신 인사가 대부분이어서 실질적인 경영진 견제는 불가능했다.
은행과 기업이 주식 보유와 거래 관계로 긴밀히 엮여 있었던 만큼 이사회에서 부실을 조기에 인정하고 부실기업의 정리나 퇴출을 요구하는 것은 곧 오랫동안 유지해 온 이해관계 전체를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직 문화 역시 이러한 관행을 고착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식 연공서열과 내부 승진 체계 속에서 상급자의 판단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조직 충성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내부에서 부실 징후를 제기하는 행위는 정당한 리스크 관리 차원의 경고가 아니라 조직의 화합을 깨뜨리는 행위로 인식되었고 이사회는 실질적인 견제와 감독 기능을 수행하기보다 경영진의 결정을 추인하는 기구로 변질되었다.
여기에 단기 순환형 인사 관행까지 더해졌다. 당시 은행 경영진은 비교적 짧은 임기를 거쳐 후배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구조에 익숙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은행의 장기적인 재무 건전성 회복보다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위기가 표면화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유인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부실채권을 조기에 상각하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면 단기 실적 악화와 그에 따른 책임 추궁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경영진에게는 손실을 조기에 인정하기보다 시간을 벌려는 유인이 더 컸다. 이러한 보신주의적 계산이 낳은 기형적인 산물이 바로 이른바 ‘에버그리닝’이었다. 은행들은 상환 능력이 사실상 상실된 기업에도 대출 만기를 반복적으로 연장하며 부실이 현실화되는 것을 계속 미뤘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연쇄 부도를 막고 은행과 기업의 재무 건전성 악화를 뒤로 미루는 효과는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훨씬 더 큰 비용을 초래했다. 자생력을 상실한 좀비기업이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으면서 자금과 노동이 비효율 부문에 묶였고 정작 미래를 이끌어갈 우량·혁신 기업으로의 신용 공급마저 위축되는 동맥경화가 발생했다.
금융시스템이 스스로 손실을 털어내고 생산성이 높은 성장 산업으로 자금을 순환시키는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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