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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LG생활건강은 지난달 22일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향후 3년간 3000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보통주 95만8412주와 우선주 3438주를 2025년부터 2027년까지 3년간 전량 소각한다. 이는 발행 주식 수 대비 각각 6.1%, 0.2%에 해당한다. 공시 전 거래일이었던 11월 21일 종가(31만4000원) 기준 3014억 원 규모다. LG생활건강은 또 내년부터 배당성향을 30% 이상 수준으로 상향 조정했다. 지난 5년간 평균 배당성향은 20%대 중후반이었다. 여기에 연 1회 정기배당 외 중간배당도 집행하기로 했다. 회사 측은 “‘선 배당액 확정-후 배당기준일 설정’ 등으로 주주들에게 예측 가능한 배당 정책을 제공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보다 앞서 남양유업은 지난 10월 자사주 소각과 액면분할을 단행했다. 자사주 4만269주 소각과 함께 1주당 액면가를 10분의 1로 쪼갰다. 지난 3년간 홍원식닫기홍원식기사 모아보기 전 회장 오너 일가의 경영권 리스크로 얼룩진 기업가치를 개선하려는 조치였다. 소각한 자사주는 231억 원 규모이며, 유통 주식 수는 67만9731주에서 679만7310주로 10배 늘어났다. 종류주 역시 20만 주에서 200만 주로 10배 불어났다.
식품기업들의 이 같은 흐름은 연초부터 이어졌다. 동원그룹 지주사인 동원산업은 올해 1월, 자사주 1046만770주를 전량 소각하기로 결의했다. 발행 주식 총수의 5분의 1(22.5%)을 넘는 규모로, 액수만 약 3300억 원에 달한다. 동원산업은 이후 지난 5월 자사주를 소각했고, 발행주식 총수는 4648만2665주에서 3602만1895주로 줄어들었다.
화장품 연구·개발·생산(ODM)기업인 한국콜마의 지주사 콜마홀딩스 역시 지난 6월 기업가치 제고를 이유로, 자사주 247만3261주(6.73%)를 소각했다. 최근에는 빙그레가 지주사 빙그레홀딩스의 설립과 함께 주가 부양으로 자사주 100만9440주(10.25%)를 전량 소각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 기업의 자사주 소각은 기업가치 제고에 방점이 찍혔다. 국내 증시 상황이 불안정한 만큼 주가 부양을 통해 주주들의 이익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윤석열닫기윤석열기사 모아보기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저평가된 한국 증시)’를 해소하기 위해 기업들을 상대로 ‘밸류업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다. 기업들은 회사 현황을 진단해 주주환원 정책, 자본관리 계획, 자산재무구조화 등의 주주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해야 한다.
내수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실적이 주춤한 점도 기업들의 이러한 행보에 영향을 미쳤다. LG생활건강은 올해 3분기 누적 매출이 5조2020억 원으로, 전년(5조2376억 원) 대비 0.7% 떨어졌다. 영업이익은 17.4% 하락한 1061억 원을 기록했다. 이 기간 남양유업은 전년보다 4.5% 준 7213억 원, 동원산업은 1.8% 하락한 6조7238억 원의 매출을 나타냈다. 저성장 여파에 내수 의존도가 높은 소비재 기업들이 역성장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3일 발표한 ‘최근 경제 동향과 경기 판단’ 보고서에서 “한국 수출이 통상 환경 변화와 미국·중국 경기 둔화 등으로 경착륙하고, 이 충격을 메워줄 내수 부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장기 불황에 진입할 가능성이 크다”고 의견을 냈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2025년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률을 1.9%, 2026년 1.8%로 2년 연속 2% 성장률을 밑돌 것이라고 내다봤다. 통계청은 11월 소비자물가지수가 114.4(2020년=100)로 작년 동월 대비 1.5% 올랐다고 밝혔다. 지난 9월(1.6%)과 10월(1.3%)에 이은 3개월 연속 1%대다. 국내 경기가 저성장, 저물가에 갇히면서 ‘뉴노멀(New normal)’ 시대에 재진입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내수 부진은 식품과 패션·뷰티와 같은 소비재 기업들에 치명타일 수밖에 없다. 이들 기업이 수천억 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주가 부양에 나선 배경이다.
아울러 한국거래소는 올해부터 기업지배구조보고서 의무 제출 대상 기업을 자산 5000억 원 이상 기업으로 확대했다. 기업의 지속 가능한 경영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목소리도 커지면서 오는 2026년부터는 모든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를 대상으로 보고서 의무 제출 범위를 넓힌다. 이에 LG생활건강은 이번 자사주 소각과 배당 확대로 ‘지배구조 핵심지표 준수율’이 현행 80%에서 87%로 올라갈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기업들의 이러한 노력과 무관하게 국내 정치 상황마저 어두워진 점은 부담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파동으로 외국인 투자자 이탈로 이어져 자칫 주가 급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실제 지난 4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36.10포인트(1.44%) 떨어진 2464.00에 장을 마쳤다. 전날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 계엄령을 발동하면서 주식시장 변동성을 키운 탓으로 풀이된다. 앞서 코스피는 지난 1년간 2300선에서 2800선을 오가면서 줄타기했다. 경제는 물론 정치적 불안감마저 더해지면서 당분간 코스피 변동성도 커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김윤정 LS증권 연구원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올해 정부 주요 정책 과제로서 적극 추진해온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인데, 정책 추진 동력이 돼야 할 법안 개정 필요 안건들이 빠르게 통과되지 못하고 계류 중이던 상황에서 이번 사태로 현 정권의 리더십과 정권 유지에 대해 빨간불이 켜지면서 정책 추진 주체 및 동력을 상실할 위험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손원태 한국금융신문 기자 tellme@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