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최종성적
일본이 자국에서 열린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 홈 어드밴티지를 업고 2위를 차지한 특수한 때를 제외하면 한국이 늘 2위를 하던 대회가 아시안게임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특정 분야가 아니라 대다수 분야에서 부진한 성적을 냈다.
중국이 금메달 132개, 일본이 75개, 한국은 49개를 땄다. 전체 메달수에선 중국 289개, 일본 205개, 한국 177개였다.
아시안게임에선 항상 한중일 3국이 독보적인 성적을 내지만, 중국·일본의 선전보다 한국의 몰락이 더욱 두드러진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65개 이상을 목표로 했다. 늘 하던 '가락'이 있으니 65개 정도는 '최소' 획득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그 최소 목표에 16개 이상 미달하는 처참한 성적을 냈다.
한국이 금메달 50개도 못 채운 건 무려 36년만이다. 그간 아시안 게임 종목이 계속해서 늘어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이 같은 몰락은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든다. 올림픽은 신규 종목 지정에 까다롭지만, 아시안게임은 웬만하면 새로운 종목을 환영한다.
■ 한국과 일본
인구가 14억에 달하는 중국은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인도와 달리 경제력과 인구를 동시에 갖춘 중국은 한국이나 일본 모두 쉽게 꺾기 어렵다. 그리고 2인자는 당연히 한국의 자리였다.
이처럼 당연해 보이던 질서가 이번에 무너졌다. 일본은 한국보다 금메달 갯수에서 26개 앞서는 여유 있는 2위를 차지했다. '대이변'이었다.
스포츠 당국자들은 금메달 수가 홈 어드밴티지를 누린 4년 전 인천 대회보다 못하지만, 당연히 2위를 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우리의 스포츠 당국은 상황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4년전 인천대회에서 중국은 금 151개, 은 109개, 동 83개로 도합 343개의 메달을 땄다. 한국은 금 79개, 은 70개, 동 79개 등 228개의 메달을 수확했다. 일본은 금 47개, 은 76개, 동 76개 등 모두 199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지난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금메달 갯수가 32개 더 많았으나 이번엔 26개나 적다. 그야말로 다이나믹한 4년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4년전 인천 대회에서 한국이 홈 어드밴티지를 누렸다고 하지만, 그 전 대회에서도 한국의 위세는 대단했다. 중국 광저우에서 열렸던 2010년 16회 대회에서도 한국은 금메달을 76개나 수확했다. 당시 한국이 딴 전체 메달수는 232개로 4년 후 인천대회에서 딴 메달수(228개)보다 많았던 것이다.
일본이 엘리트 체육을 강화했다는 사실은 스포츠 행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일본은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스포츠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 이번 아시안 게임이 일본 선수들에겐 도쿄 올림픽 전초전 성격도 있었다.
일본이 노력을 한 만큼 한국은 노력을 안 할 것일까. 아무리 일본이 스포츠 투자를 과감히 했다고 하더라도 금메달 갯수 우위가 '+32에서 -26'으로 바뀐 사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고르게 부진했던 한국..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번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유독 부진했던 원인은 뭘까.
일부 지인은 한국이 수영과 육상 같은 기초 종목에서 중국, 일본에 크게 뒤졌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수영에서 중국과 일본이 각각 19개의 금메달을 딴 반면 한국은 겨우 1개만 땄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분야를 강화해야 하지만, 이런 진단은 완벽하게 틀렸다.
한국은 원래 아시아에서도 수영과 육상의 강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간 아시아 수영 대회에서도 박태환을 빼면 금메달을 가져올 만한 선수가 거의 없었다. 원래 중국, 일본과 게임이 되지 않았던 수영의 부진은 이번 대회의 총체적 부진과 크게 상관이 없다.
한국은 수영, 육상을 제외하고 태권도, 유도, 레슬링과 같은 격투기 종목, 사격이나 양궁과 같은 슈팅 종목, 다양한 구기 종목 등에서 아시아 최고의 경쟁력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선 이런 종목들에서 '고르게 부진'했기 때문에 3위로 떨어진 것이다.
이를 두고 아시아 각국 전력의 평준화 영향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는 그 만큼 한국의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얘기와 같다.
24년 전 한국이 일본에 밀렸을 때도 근소한 차이였다. 1994년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은 금메달 64개, 한국은 63개를 땄다. 일본이 홈 어드밴티지를 업고 간신히 한국을 따돌렸던 것이다.
1990년과 1986년 대회에서도 한국은 언제나 일본 위에 있는 2위였다. 특히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거의 우승을 할 뻔했다. 당시 중국이 금 94개, 한국이 93개를 땄으며, 획득 메달수에선 한국(224개)이 중국(222개)을 앞질렀다.
이랬던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가 갑자기 몰락한 원인은 뭘까. 단순히 선수들의 투쟁심 부족, 일본의 투자 확대 등에 그 이유를 돌릴 수는 없다. 미스테리한 사건처럼 느껴진다고 하면 너무 과민한 것일까.
나는 이번 아시안 게임의 부진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부진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없고, 궁금증도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 다들 엘리트 체육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향후 한국의 인구 구조를 감안하면 장기적으로 한국의 스포츠가 국제대회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더 어려워진다.
지난 해 한국에선 35만명을 겨우 넘는 신생아가 태어났으며, 올해는 32만명대의 신생아 출생이 예상된다. 지금의 40대 후반, 즉 1970년 전후엔 100만명 내외의 신생아가 태어났으나 지금은 1/3로 대폭 줄어든 것이다. 크게 쪼그라들고 있는 젊은 층 인구는 국제 경기에서 한국의 경쟁력 약화를 뜻한다.
여기에 지금은 남자 금메달리스트의 병역 면제 문제와 관련해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다. 몰락해 가는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에 악재가 하나 더 더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 냉정한 언어의 실종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혹시라도 손흥민이 군대에 가야하지 않을지 걱정했다.
다행히 한국 축구가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우리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손흥민의 전성기를 좀 더 만끽할 수 있게 됐다.
군 복무를 하는 손흥민을 보면서 마음의 위로를 얻는 사람보다는 유럽에서 전해지는 손흥민의 골 소식에 기분이 상쾌해질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흥민의 군 면제는 자신이나,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나 잘 된 일이다.
주변에선 엘리트 체육이 아니라 생활 체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도 한다. 맞는 말이다. 나도 모든 국민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가 잘 해왔던 엘리트 체육을 굳이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간 '금메달'만 알아주는 성적 지상주의에 비판도 많았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과거에 비해 성과가 크게 나빠졌는데, '그래도 잘했다'면서 박수만 치다가는 우리는 뒤쳐지고 만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번 대회의 부진 이후 냉정한 평가는 별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신 이번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을 향하는 "여러분은 영웅이다. 수고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이런 감성적인 언어가 마냥 싫다는 게 아니라, 냉정한 언어가 실종됐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언어엔 균형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제력이 올라온 뒤 치렀던 아시안게임 중 이번 대회만큼 최악의 성적을 낸 대회는 없었다. 냉정한 언어가 도태되고 감성적인 언어만 판을 치게 되면 그 사회는 위험해진다.
장태민 기자 chang@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