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그럴 것이 오랜 기간 국내 증시가 저평가 상태에 머물렀던 데는 ‘투명하지 않은 기업 지배구조’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런데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전격 지지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자 해외 시장이 우리를 진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한국 증시가 외국인들의 놀이터 상태에서 벗어날지도 모르니 말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우리말로 하면 ‘청지기가 지킬 지침’이 되겠다. 여기서 청지기는 고객이나 국민으로부터 돈을 수탁해 대신해서 운용하고 있는 기관투자가다. 이들이 지킬 가이드라인을 적시한 게 스튜어드십 코드다. 연기금이나 자산운용사들은 돈을 대신해서 맡기 때문에 지켜야 할 일종의 윤리가 있다. 일단 투자를 위해 기업들을 선정하는데, 이를 잘 골라야 하는 건 기본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 기업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면서 기업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이렇게 주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돈을 맡긴 사람들에게 이를 투명하게 보고해야 한다.
주요 기관들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속속 도입하고 있는 이때,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가장 하는 일이 많은 민간기관으로 손꼽힌다. 최근에는 스튜어드십 코드 제정에도 참여하고, 코드를 도입한 기관들의 이행 점검까지 하냐는 비난을 받으며 홍역을 치렀다. 그야말로 스튜어드십 코드 시대의 ‘절대권력 기관’이라는 지적이다.
조명현 원장은 “직원 서른 다섯명이 무슨 절대권력인가(웃음). 이슈의 중심이 되니까 우리를 시기하는 회사들이 많아졌다. 같은 연구원끼리도 시기하는 데가 생겼더라. 좀 놀랬다. 서로 도와가면서 해야 되는데.”라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이들이 하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점검 우리 역할 아냐
이행점검의 ‘이’ 자를 꺼내자마자 조 원장은 강한 부정론을 폈다. 여기서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점검이란 코드를 도입하기로 한 기관이 이행하기로 한 수탁자 책임 원칙 조항(총 7가지 원칙 중 이행하겠다고 선언할 조항을 선택할 수 있다)을 잘 지키고 있는지 관리·감독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행점검을 할 의향도 없고, 할 능력도 없다. 개별 이행점검은 우리 같은 민간기관이 할 수가 없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찾아가도 점검을 하겠다면 못 들어오게 막는 마당에 민간기관에 그럴 힘이 어디 있겠나.”
조명현 원장은 시기하는 세력들의 음해라고 주장했다. 기업지배구조원은 스튜어드십 코드가 이슈가 된 지난해 말부터 같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렇게 논란의 핵심으로 지목될 만큼 인지도가 있는 민간기관이 본래 아니었다. 소문은 꼬리를 잇고, 조 원장이 현 고려대 교수이기에 문재인 정부 실세의 특혜를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담백하다.
“우리가 이행점검을 한다고 문제제기하는 쪽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읽어보지도 않은 것 같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읽어보면, 기업지배구조원은 간사 역할을 맡는다고 돼 있다. 일종의 총무 역할이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참여하겠다는 기관의 신청서를 받고 웹사이트에 게재를 해주고, 또 도입하고 싶어 하는 자산운용사가 절차를 모를 때 상담을 해주는 일 등을 한다. 기업지배구조원이 자본시장의 인프라 역할을 하는 셈이다. 자율적, 독립적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는 자본시장의 핵폭탄
사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스튜어드십 코드의 영향력이다. 일부 독자는 기관투자가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다고 뭐 엄청난 영향력이 있을까 의심할지도 모른다. 조명현 원장은 스튜어드십 코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세 가지를 꼽는다. 그리고 그 여파는 바로 도입 이후 주주총회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핵심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의결권 관련 지침을 만들고 제대로 행사하겠다. 기업들과 건설적인 대화를 하겠다. 이해상충을 해결할 원칙을 만들고 해결하겠다.’ 이게 가장 중요한 3가지 원칙이다. 이 기준들이 마련되면 지금까지 주주총회에서 벌어졌던 관행들이 사라지고 체계적인 형태의 의사 결정이 이뤄질 것이다. 지금의 주주총회는 마치 초등학교 학예회 같다. 우리나라 주주총회가 얼마나 황당한가. 코스닥은 몇 명 참여하지도 않는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호락호락한 가이드라인에 불과했다면 국민연금이 도입하는 데 이렇게 망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 업무 관련 용역 입찰까지 착수했지만, 번번이 유찰되며 시간을 끌었다. 지난달 말에서야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국민연금 기금운용체계 개편안' 등을 논의, 내년도 스튜어드십 코드를 입법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조 원장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주총에서 ‘쓴소리’가 많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
“우리나라 같은 소유구조에서는 비토하기 쉽지가 않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면 비토된 목소리도 나오고, 주주총회가 진지해 지면서 어떤 게 회사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을까, 이런 진지한 고민들이 자유롭게 쏟아져 나올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스튜어드십 코드는 자본시장의 핵폭탄이다.”
♢코드 이행 강제성은 시장에서 발생하도록
그렇다면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점검은 누가, 어떻게 도맡아서 해야 하나. 도입보다 더 중요한 게 본 취지대로 제도가 정착할 수 있게끔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 논의는 꽤 중요하다. 조 원장은 우선 해외 사례를 제시했다.
“개별 이행점검은 해외 사례를 보면, 금감원 같은 기관이 도맡아서 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영국에서도 자율규제 형태로 했는데 잘 안 돼서 영국 감독기관이 맡아서 하고 있다. 제일 잘 이행하는 기관은 티어(tier) 1, 그 다음을 티어 2, 3… 이런 식으로 공표를 한다. 그러면 시장에서 이 공표된 자료를 확인하고, 제대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이행하는 기관에 돈을 맡기게 된다.”
이렇게 보면 스튜어드십 코드의 강제성은 시장에서 발생하는 셈이다. 하지만 감독기관이 이행점검을 한다면 스튜어드십 코드가 지닌 ‘자발성’이란 성격이 훼손될지도 모른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청지기 정신’인데.
“자율점검을 해도 상관없다고 본다. 다만, 금융투자협회는 지금 증권사, 자산운용사 두 축으로 되어 있고, 연기금이 안 들어가 있어 좀 곤란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연기금과 자산운용사가 같이 ‘한국기관투자자연협회’ 이런 걸 하나 만들어서 같이 가입을 하고, 거기서 자율규제 형태로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점검을 하는 것이다. 자율규제 형태로는 이게 제일 좋다.”
♢국민연금의 코드 도입,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앞서 언급했듯 연기금 중 가장 큰 손인 국민연금은 아직까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최근 우정사업본부, 교직원공제회 등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방침을 정하고 투자 검토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과 비교해 지나치게 느리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하나는 ‘부처 이기주의’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금융위원회가 주관하는데, 국민연금공단은 보건복지부 산하에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인해 져야 할 책임이 늘어날까봐 꺼린다는 것.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 책임질 게 많아질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생각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 오히려 책임이 없어진다. 정해진 의결권 프로세스에 따라서 결정했다고 하면 아무도 시비 걸 일이 없어진다.”
조명현 원장은 국민연금의 두려움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더라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못 박았다.
“지금은 그런 프로세스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여서 두 의결권 자문사가 제일모직 합병안에 반대를 했는데도 내부 운영위원회에서 찬성을 해버렸다. 그게 아직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아닌가.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책임을 지게 하는 게 아니라 투명해지기 때문에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아직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시기는 내년 중 어느 때인지 예정되지 않았지만, 도입만 하게 된다면 그 영향력은 가히 놀라운 수준일 것이다. 각계 인사들이 국민연금의 발걸음을 예의주시하는 이유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지 않는 자산운용사들에는 돈을 맡길 수가 없게 된다. 수탁자 책임 이행을 선언한 것이니까. 국민연금에게 돈을 받는 자산운용사들은 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게 된다. 그 수가 백여 개는 될 것이다.”
♢연기금 주식운용 외부용역에 맡겨야
마지막으로 조 원장은 연기금의 주식운용 아웃소싱이 대폭 확대되야 한다는 의견을 펼쳤다. 이는 그가 일전에 국제 행사에서 경험한 충격에서 기인한다.
“지난번 ICGN(International Corporate Governance Network) 연례행사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발표를 했다. 뱅가드, 블랙록 같은 대형 자산운용사들과 MSCI 같은 기관 대표자들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다. 거기서 만난 일본 연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이 이런 충격적인 말을 해줬다. 일본 공적연금에서는 주식 운용을 100% 외주업체에 맡긴다. 봉급보다 성과급 받는 민간이 훨씬 운용을 잘하는 게 상식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자산운용 업계를 고려한 충고이기도 하다. 국내의 경우 일본과는 달리 국민연금이 75% 자체운용, 25% 외주 운용을 주고 있다. 선진 사례를 본받는다면 한국의 자산운용업 역량도 개선되고, 기금운용 수익률도 더 좋아지지 않겠느냐는 기대다.
“우리는 (외주 운용 비율이 적은 이유로)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국민연금이 지금까지 외주 준 기관들을 잘못 뽑았던지, 아니면 아주 우수한 인력이 국민연금에 모여있던지(웃음). 국민연금이 일본과 같이 100% 외주를 주면 전경련이 주장하는 연금 사회주의 논란이 사라지고, 자산운용업이 활성화된다. 한국의 자산운용사업 경쟁력이 확장될 것이다.”
구혜린 기자 hrgu@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