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학문 영역이 전문화되어 가는 추세를 미루어 보면 드러커 교수는 경영학 분야에서는 이 시대의 마지막 르네상스인이 아니었을 까 싶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삶 그 자체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는 인물이다. 최근에 국내에 소개된 두 권의 저서 즉, <피터 드러커 자서전>(한국경제신문)과 <피터 드러커 나의 이력서>(청림출판)는 드러커란 인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던져주기에 충분한 책이다.
드러커 교수가 영원한 현역으로 95세의 나이까지 장기간 영향력을 만들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면, 하나는 그의 사상적 뿌리에 대한 생각과 스스로를 동기 부여하는 나름의 독특한 방법을 찾아내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태어난 비엔나라는 도시는 하이에크, 슘페터 그리고 미제스 등과 같은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뿌리가 짙었던 곳이다. 훗날 뉴욕 대학에서 만난 은사 미제스와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그의 학문이 쌓아올려진 기초는 매우 단단하였다.
자유주의 철학자 미제스를 두고 “1950년대 나는 뉴욕대학에서 미제스와 함께 강의를 했지만 우리는 서로 상대방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미제스는 나를 진정한 경제학과 결별한 변절자로 생각했다.”고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드러커 교수는 자유주의 철학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자신의 학문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훗날 그의 생각은 지식근로자나 민영화와 같은 개념으로 구체화될 수 있었는데 그의 자서전 속에는 전체주의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란 대목이 항상 하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드러커 박사는 <프랑크프루트 게네럴 안차이거> 신문사의 기자로 있을 때 취재 차 히틀러 자신과 주변 취재를 통해서 전체주의의 특징을 정확하게 간파하게 된다. 이 대목은 자서전 곳곳에 등장하게 되는데 결국 한 인물의 학문 세계 뿐 만 아니라 성공 그 자체는 굳건한 철학 위에 구축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그가 14세가 되던 1923년 11월 11일 사회주의 청년단의 선두에 서서 붉은 깃발을 내걸고 혁명가를 목소리 높여 외치면서 가두 행진하던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는 “오늘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행진 도중 문득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들고 있던 붉은 깃발을 누군가에게 억지로 떠맡기고 대열을 빠져나왔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다른 한 가지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을 들 수 있다.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치고 스스로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드러커 교수가 일년 가운데 3개월 정도를 떼어서 새로운 주제에 대한 공부를 행하고 이를 자신의 영역 개척에 활용하는 경우를 눈여겨 볼 수 있다.
결국 새로운 영역의 개척이란 것은 투자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드러커 교수의 방법은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척 컸다고 하겠다.
“저술 활동과 강의 등 일 외에 나는 매년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여 3개월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2004년에는 명나라 시대의 중국 미술에 몰두했다.”
그가 타개하기 일년 전의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평생 동안 부지런히 읽고, 쓰고, 생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한 분야에서 장인이 된 사람들이란 결국 연습이란 단어와는 떨어져 생각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자서전에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데 하나하나가 그냥 넘겨버릴 수 없을 만큼 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GM의 전설적인 경영자 슬론을 두고 “주목해야 할 슬론의 자질은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이상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람은 갔지만, 그의 삶을 읽어가면서 기쁨과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후인들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관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