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문가들은 모두 아일랜드를 유럽경제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아일랜드 모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와 아일랜드는 많이 다르다. 아일랜드는 유럽에 있고 영어가 상용어이다. 미국으로 이민간 아일랜드계는 그 동안 미국 대통령을 7명이나 배출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할 때 마이크로 소프트나 인텔 등 미국계 기업들이 아일랜드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영어가 상용어가 아닌데다 규제를 과감하게 없애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아일랜드를 배우자고 할 수는 없다. 우리기준으로 따질 때 아일랜드 사람들의 생활은 무미건조한 편이라 외견상 우리보다 잘사는 것 같지도 않다.
2차대전 직후에는 독일의 경제부흥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독일은 2차대전 당시 세계 최강국 중 하나로 세계대전을 일으킬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경제력이 다시 살아난 것이니 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독일은 금융시스템이나 기업의 지배구조라는 측면에서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은행이 기업의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자금을 대주기 때문에 경제력에 비해 증권시장이 취약한 편이다.
또 기업이사회를 감독이사회와 집행이사회의 2개로 나누어서 노조가 감독위원회에 참가해서 경영감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우리나라의 일부 인사들이 독일식 기업지배구조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일의 경제시스템은 모두 독일 특유의 역사와 국민성, 문화등 요인이 뒤엉켜 나온 산물이다. 그 중에서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해서 그것만을 모방하자고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한국의 기적은 기술경쟁력 우위 판가름
경제성장 견인한 기업역할 폄하해선 안돼
기업활동지원보다 발목잡는 정책이 문제
요즘 정치권에서 말하듯이 국방정책은 프랑스 방식을, 선거제도는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독일식 기업지배구조는 독일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외국인들이 독일기업에 투자하길 꺼리는 장애가 되고 있다. 누가 돈대고 노조의 간섭을 받으려 하겠는가. 경영자에게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확보되면 어떤 노조라도 근로시간을 줄이고 후생복지 지출은 계속 늘이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기업들의 경영이 악화되자 최근 BMW등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근로시간 연장, 임금삭감등 합의가 나오고 있다.
세계의 경제기적 중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역시 중국일 것이다. 연 9% 성장을 20년이상 계속해오고 있다. 성장의 내용도 점차 좋아져 단순한 노동집약적 산업 중심이 아니라 하이테크나 중화학공업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곧 중국에 추월당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지금은 반도체, 자동차등 일부 분야에서 앞서있기 때문에 그나마 수출여력이 있지만 기술적으로 뒤지면 수출할 상품이 없어질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은 기술투자를 더 해서 계속 앞서가야 하느냐 아니면 산업구조를 중국과 상호보완하는 쪽으로 바꾸어야 하는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 기술에서 앞서가자면 삼성, LG등 이미 세계적 수준에 이른 대기업이 분발해주어야 한다. 정부도 규제완화나 세제혜택등을 통해 우리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들 기업이 과거에 저지른 불법 정치자금 제공등 부패관련 문제, 변칙적 방식으로 아들에게 상속한 문제등이 뒤엉켜 지원은 커녕 응징을 할 분위기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현대차나 포스코등이 중국의 눈치나 살피면서 상호보완하자는 자세로 나갈 수도 없다. 국제경쟁에서 누가 누구를 봐주겠는가.
그런데 세계 각국은 모두 한국경제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왜 기적인가. 지난 40여년전만 해도 한국은 1인당 소득이 80달러 수준으로 세계 최하위권이었다. 이런 나라가 40여년, 그러니까 한 세대만에 경제규모로 따져 세계 11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규모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칭찬 받을 만 하다.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철강, 조선, 중화학, 섬유등이 모두 세계 10위권에 드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축구로 말하자면 멀티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저임금, 환경파괴, 정경유착등 사례가 많았다. 다만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높아져 이제 한국의 민주화도 세계적인 수준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평가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한국 역사는 경제기적이 아니라 반칙과 부패로 얼룩진 부끄러운 역사라는 것이다. 인권을 유린하고 독재하면서 이룬 성장을 업적으로 평가해 줄 수 없으며 그 시대에는 누가 집권했어도 그 정도 성과는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정치적인 말장난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견해가 다른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것은 정치인들의 체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렇게 믿는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앞으로 우리경제의 진로와 미래가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계각국이 연금이나 교육, 그리고 실업문제로 고민하고 외국인 투자를 한푼이라도 더 유치하기 위해 뛰고 있는데 우리만 “그까짓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이만큼 할 수 있었다면 왜 김일성은 못했을까. 왜 카스트로는 못했을까. 세계의 찬사를 받는 중국의 성장전략도 따지고 보면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다를게 없다.
누구나 개발초기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일성의 평생소원은 “전 인민이 쌀밥과 고깃국을 먹을 수 있도록”해주는 것이었다. 고마운 말씀이다. 우리 남측은 지금 그렇게 못해주고 있다. 아이들이 도통 쌀밥을 먹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햄버거나 피자가 더 좋다는 것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웰빙인가 참살인가 하는 것 때문에 고깃국 보다 못살던 시절에 먹던 보리밥이나 된장국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 남북한을 합친다면 인구가 7천만이 넘는다. 독일보다는 좀 적지만 영국과 프랑스 보다는 많다. 이 정도의 인구와 경제력을 갖춘 나라가 다른 지역에 있었더라면 그 지역의 맹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계 4대강국이 맞붙는 지역에 있다보니 왜소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학자인 폴 케네디 교수는 한국의 경우 외교력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주변 4대 강국 사이에서 게임을 잘 해야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외교역량이 만족스런 수준인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북한이 외교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해서 초라한 경제력에 비해 그럴듯한 대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외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업들이 분발해서 대접을 받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IT강국이며 휴대폰, 냉장고, 에어컨등을 엄청나게 수출해서 중동이나 중남미에서는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전략은 커녕 경제성장을 내세우는 것 조차 금기시하고 있다. 성장이 중요하다면서 과거의 부정과 반칙을 덮자는 음모가 있다는 것이다. 친일파, 수구세력 등을 계속 두드리면서 개혁을 계속해야 하는데 왜 경제문제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냐는 것이다.
그런데 명색이 세계 11위 경제대국인 우리도 허점이 많다. 시중은행은 전부 외국인 손에 들어갔고 우리의 간판기업인 삼성전자, 포스코 등은 외국인 주주가 50-70%에 달한다. 금융산업과 블루칩 기업을 모두 팔아 넘긴 셈이다. 선진국에서는 기술력 있는 기업이 외국인에게 넘어가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치거나 새로운 법을 만들고 있는 판에 우리는 세계적 기업을 지키기 보다 재벌가족들을 불러 혼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 드높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곧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낼 것 같다. 아르헨티나에 이어 최단시간에 선진국 문턱에 갔다가 최단시간에 추락하는 기적 말이다.
관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