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IMF의 묵시적인 강요하에 금감위가 이러한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그래서 ‘2차 구조조정’이 정책적으로 ‘계획’되고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지난 3월 하순경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등을 통해 “2천1년을 전후해 또 한차례 은행간 인수, 합병을 통한 몸집불리기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등 은행업의 구도가 이대로 안착하지는 않을 것임을 여러 차례 시사한 바 있다. 이에대해 금감위는 ‘원론수준의 전망일 뿐’이라고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그러나 98년을 기점으로한 ‘1차 은행구조조정’이후 눈에 띄는 몇가지 변화들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첫째가 은행 지배구조의 개편이다. 은행들은 올들어 한결같이 ‘비상임 이사’중심의 이사회 기능강화를 골격으로 하는 지배구조의 개편을 단행했다. 금감위는 직간접 경로로 은행을 강제했다. 이론이 분분했지만, 모두가 유사한 형태의 지배구조를 채택했다. 은행장의 권한은 약화된 반면 비상임이사들의 역할과 기능은 막강해졌다. 눈여겨 봐야할 것은 정부당국이 이사회를 통해 거의 모든 은행에 ‘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분구조로 볼 때 정부은행이나 다름없는 한빛, 제일, 서울은행이 그렇고 공적자금이 투입된 조흥, 외환, 평화은행, 정부지분이 여전히 남아있는 국민, 주택은행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이사회에 ‘라인’을 심었다. 정부쪽과 통하는, 또는 정부가 사실상 선임한 이사회 멤버가 누군지, 해당은행의 핵심정보를 가지고 있는 고위간부들은 대개가 알고 있다. 일부은행에서는 이미 비상임 이사와 상임 경영진간의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비상임이사 중심의 이사회는 은행의 미래를 뒤집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적어도 그럴 개연성이 정부당국과 보다 체계적인 고리로 연결된 셈이다. 당국이 올들어 은행의 지배구조에 집착한 흔적은 여러 경로로 관측된다. 일례로 위성복행장이 조흥은행에 돌아오기 전까지 시중은행들은 ‘이사대우’라는 직위를 입에 담지도 못했다. 한 시중은행은 임원이 맡을 사업본부를 1급부장에게 맡겼다. 이사대우라는 직위를 쓸 수 없고, 임원숫자는 줄여야하니 ‘상무대우 부장’이라는 기형적인 인사가 이루어졌다. 이사회 기능의 강화 및 은행 상임이사수 축소는 서구식 지배구조의 도입과 경영조직의 효율을 높이자는 취지로 이해되지만, 과연 당국이 그렇게 집착할만한 ‘가치’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애매한 점이 있다.
연초부터 최근까지 은행권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했던 전산부문의 이슈, ‘토탈 아웃소싱’도 논란거리다. 은행의 전산시스템 운영을 전면적으로 외부 전문업체에 맡긴다는 내용의 ‘토탈 아웃소싱’은 몇몇 은행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검토됐다. 그 중 일부 은행은 최고경영자가 직접 실무부서에 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노련은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98년 5개은행 퇴출시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전산부문이며, 당국이 ‘토탈 아웃소싱’을 통해 은행 전산조직을 떼어내 2차 구조조정을 쉽게 풀어나가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강변했다.
최근 시중은행 공동 임단협에서 쟁점으로 부상한 계약직 채용의 문제와 은행들의 잇단 연봉제 도입도 역시 당국의 가이드 또는 ‘인터내셔널 베스트 프랙티스’에 맞닿아 있다. 우리나라의 은행간 합병은 ‘인적 합병’이라는 점이 심각한 장애요인이며, 역시 2차구조조정을 앞둔 정책적 정지작업의 일환이 아니겠느냐는 게 금융노련의 주장이다.
일련의 변화를 모두 ‘음모’의 근거로 제시할 정도로 은행노조측은 절박하다. 그것이 당국에 의해 계획된 변화이든, 순리에 따른 불가피한 접근이든, 은행권이 ‘98년’에 비해 훨씬 유연한 구조조정 기반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구조조정 인프라’의 핵심은 그 중에서도 ‘인식의 변화’다. 은행 스스로가 인수, 합병등을 선택가능한 전략적 대안으로 생각하게 됐다는 점이다.
성화용 기자 yong@kftimes.co.kr